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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비판적 정치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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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
기사입력 2019-05-20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종교와 정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제도들이고, 그 둘은 매우 복잡한 관계를 맺으면서 공존해 왔다. 지금도 그 둘의 관계는 항상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서 16세기 종교개혁만큼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도 드물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그 끝에 맺어진 웨스트팔리아(Westphalia) 평화조약(1648)으로 신성로마 제국이 종말을 고하고 민족 국가들이 일어났으며, 1655년에 맺어진 아우구스부르크(Augusburg) 평화조약에서는 정권이 종교를 결정하는(cuius regio, eius religio, “누구의 통치, 그의 종교”) 원칙이 만들어져서 후에 유럽교회가 식민지 지배를 묵과하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사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혁자들의 가르침이다. 중세의 천주교는 은혜와 자연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한 이원론적 세계관에 따라, 자연 영역에 속한 국가의 독자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국가의 박해를 소극적으로 인내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당시의 일부 재세례파 급진주의자들은 국가의 권위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루터와 칼뱅은 그 중간 입장을 택했다 할 수 있다.

 

그들이 모형으로 채택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이론이었다. 당시의 교회가 믿었던 “기독교적 로마”(Roma Christiana), “영원한 로마”(Roma aeterna)란 망상을 비판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과 땅의 도성 혹은 악마의 도성을 엄격하게 구분했고, 하나님의 백성은 땅에서는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극단적인 이원론을 따르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도 땅의 일에 참여해 “상대적인 선”을 이룩하려 노력해야 하고, 이 세상의 나라도 교회를 위하여 우상숭배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유산을 이어받아 루터와 칼뱅은 “두 왕국” (two kingdoms) 혹은 “두 영역” (two realms) 이론을 제시했다. 국가와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지만, 그 통치 방식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국가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있고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회가 국가의 영역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교회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두 왕국 이론”에 대한 두 개혁자의 관점에는 조금의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교회가 국가의 영역에 전혀 간섭하지 말아야 하고 생각했고 정치에는 비교적 무관심하고 수동적이었다. 그와는 다르게 칼뱅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나타나야 하므로 국가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국가가 완전히 중립적이고 독자적일 수 없다는 견해를 취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국가가 교회의 업무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뿐 아니라, 국가가 정의롭게 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할 의무가 있음을 시사했다. 칼뱅 자신도 제네바 시의 행정에 적극적으로써 개입함으로 자신의 그런 주장을 실천했다. 특히 그는 인간의 전적 부패를 심각하게 취급했으므로 통치자의 독재를 막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아직도 왕권신수설이 일반적이었던 그 시대에 혁명적인 입장을 취했다 할 수 있다. 

 

정치에 대한 수동적인 루터의 입장은 결국 나치 정권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칼뱅의 다소 능동적인 입장은 한때 미국에서 유행했던 “사회복음”(social gospel) 운동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오해를 받기까지 했다. 즉 교회의 역할은 정치와 사회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란 입장이다. 정치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카이퍼의 소위 신칼뱅주의도 일종의 사회복음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보다 적극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칼뱅도 두 왕국 이론에 동의했고 그의 입장을 따르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국가나 정치의 목적은 악을 억제하는 것이지 사람과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와 그리스도의 통치로만 가능한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국가와 정치에 전혀 무관심할 수는 없다.   

 

칼뱅이 왕정보다는 귀족주의나 민주주의를 선호한 것은 민주주의가 왕정보다는 정치권력의 부패를 막는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고, 부패는 반드시 사회정의를 파괴해 약자들에게 고통을 가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모든 시민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가 잘못되어 부패가 만연한데도 아무 관여도 하지 않는 것은 곧 정의가 파괴되어 약한 시민이 억울함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정치에 참여하되 어떤 형식으로 정치에 참여할 것인가는 그 사회의 현실과 정치 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북유럽 국가들처럼 정치가 성숙하고 질서가 잡힌 사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정당을 만들고 권력을 얻어서 올바른 정치를 할 의무가 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의 나라에서는 기독교 정당이 조직되어 그 임무를 잘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정치적 수준이 매우 낮은 나라에서는 비도덕이나 불법과 타협하지 않고는 권력을 얻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기독교 정당을 조직하고 기독교 이름으로 정치한다는 것은 곧 불의와 타협하는 것을 뜻하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에 해만 끼칠 뿐이다. 거기다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책임 있는 정치를 주도할 만한 능력과 성숙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정치와 한국 기독교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성숙해지기 전에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참여는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비판적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정치권력의 부패로 악이 극심해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는 데 힘을 쏟는 것이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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