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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그날 신민당 전당대회 '반전'이 일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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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국 기자
기사입력 2019-05-30

 # 박정희 대통령 철권시대인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김대중이 연합해 성공시킨 김영삼 총재 선출의 파란은 이 나라 유신독재의 종막을 알리는 장엄한 쾌거였다. 필자는 한국 민주화의 초석을 구축한 당시 신민당 전당대회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꼈던 당시의 열풍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해방과 독재, 철권통치를 거쳐 민주화 초석 구축

79년 신민당 전당대회까지의 험난했던 정치적 여정

 

대한민국 현대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거쳐 3년간의 군정기를 지나 1948년 5월 10일 총선 및 7월 17일 헌법제정,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제1공화국이 시작됐다.

 

연로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종신집권을 도모하기위해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를 감행했으나, 분노한 학생들의 궐기(4.19)로 하야하고, 1960년 7월 29일 장면을 내각수반으로 제2공화국(대통령 윤보선)이 출범한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집권당 내부 신구파의 갈등(신파 장면/구파 윤보선)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국을 불안하게 하는 바람에 이를 노린 박정희 등 정치군인들은 1961년 5월 16일 전복 당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무력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계엄 정국을 이끌다 민정 이양을 선언한 후 1963년 제5대,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에 연속 승리를 차지한다. 직후 1969년 10월 21일 3선 개헌을 단행하고 1971년 4월 27일 제7차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약 8%(95만표)차로 가까스로 당선된다.

 

이에 놀란 박정희 대통령은 종신대통령을 도모하기 위해 1972년 10월 17일 한국적 민주주의 실현이란 미명하에 유신을 선포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로 헌법 개정을 확정한 후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민주주의의 종언이자 영구집권이 사작된 것이다.

 

이렇게 영구집권을 시작한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8일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1976년 5월 25일 깡패 김태촌 조직을 사주해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김영삼 총재 폭행 및 신민당 전당대회장에 각목을 휘둘러 이철승을 대표로 세웠다. 1975년 5월 13일에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시켜 철권통지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또한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명동구국 선언을 빌미로 윤보선, 김대중,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18명을 체포하고 김대중 등 11명을 구속 기소시킨다. 유일 독재자만이 존재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조종을 울린 슬픈 역사의 상흔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토의 상황에서 치러진 1978년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61석의 의석을 확보하면서 득표율 32.8%로 공화당의 31.7%에 1.1% 승리하는 이변이 발생하고 응어리진 국민들의 심정이 표출되기도 했다(공화당 68석). 한국현대사의 운명을 바꿀 역사의 새날을 이렇게 희미하게 닦아오고 있었다.

 


 

백두진 국회의장 내정 파동부터

김재규 정보부장의 김영삼 총재 출마포기 협박

신민당 전당대회 과정

 

1979년 새해 아침부터 제10대 국회의원 원 구성을 둘러싸고 박정희를 배경으로 철권을 휘두르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유정회 출신 백두진을 국회의장으로 내세우려 한다. 김영삼은 당시 강력 반발하면서 민주회복을 부르짖는다.

 

이같은 상황에 격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당시 김영상 총재의 출마포기를 종용하며 “말을 듣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고 협박한다(김영삼 회고록 및 김재규 재판 증언 등). 그러나 김영삼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면서 “이런 행동은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앞당길 뿐”이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이 과정에서 ‘1979년 5월 30일 신규로 확보한 신민당 마포당사에서 총재 경선 전당대회가 개최된다’라는 공지가 뜬다.

 

참여하의 개혁을 슬로건으로 한 이철승 당시 대표최고위원 및 민주회복을 부르짖는 김영삼, 신우회를 이끌고 있던 신도환, 민주사상연구회의 이기택, 화요회의 박영록, 동양정경연구회의 김재광 등 7명이 총재 출마를 선언한다.

 

초기(3~4월)에는 이철승 현 대표의 우위가 점쳐졌다. 이철승 대표가 당시 상대지분을 가지고 있는 유치송계와 이충환계를 확보해 세 우위가 표면적으로 확인되었으며, 정부의 은밀한 자금지원 등으로 이변이 없을 것으로 각 정보기관들은 예측했다.

 

사실 신규 신민당 마포당사는 이철승이 대표최고위원(1976~1979)시절 온건 노선을 약속하면서 정부 지원으로 지어지 건물이었다. 선거초반에는 ‘이철승 현 대표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예상 속에 흥행열기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김영삼 후보가 각 지구당 연설 때마다 민주회복을 부르짖으며 “헌법을 개정해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게 하겠다”라고 하자 언론들이 이를 여과 없이 보도해 판세를 출렁이게 했다. 여기에 ‘김대중 선생이 지원하고 있다’는 설까지 돌며 국민적 관심을 이끄는데 성공했다.

 

흥행에 당황한 이철승 후보측은 김영삼 후보를 향해 ‘위장선명업자’라고 맹폭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 이즈음 박정희 대통령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이철승 당선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는 김영삼 및 측근들에 대한 특별 미행조사를 지시하는 등 이철승 당선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운명의 날(5월 30일)을 하루 앞둔 29일 이철승 후보는 종로 한일관에서 김영삼 후보는 을지로 4가 아서원에서 자파 대의원 단합대회 개최를 알리며 많은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이 와중에 김영삼 후보 단합대회에 김대중이 참석해 김영삼 지지연설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은밀히 퍼져 나간다. 단합대회 전 박영록, 김재광, 조윤형 등 친 김대중계 후보 3명은 후보를 사퇴하고 김영삼 후보 지지를 선언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을지로 4가 아서원에서 거행된 ‘민권의 밤’이란 김영삼 후보지지 모음은 수백명(김영삼측 추산 800명)의 운집 속에 6시부터 시작되어 열기를 더하던 중 오래지 않아 김대중이 전격 참석해 1시간에 걸쳐 “유신체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김영삼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열변을 토해낸다.

 

수없는 박수소리와 함께 장내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까지 지속적으로 흘러 나왔다. 사실 김대중은 김영삼 연설장에 나타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대중은 1976년 3월 1일 명동선언으로 체포 구속되어 5년형을 선고받아 서울대 병원에서 감금 수용됐다가 78년 12월 28일 제9대 대통령 취임식 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삼엄하게 연금되어 있던 김대중이 김영삼 연설장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종로 한일관에서 진행된 이철승 후보측의 ‘승리를 위한 밤’ 역시 밤 늦게까지 지속되면서 표 단속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금상태에 있는 김대중이 아서원에서 김영삼 후보 지지연설을 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대의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렇게 성대한 전야제(자파단합대회)를 거친 후, 1979년 5월 30일 10시경부터 신민당 마포당사에서 총재선출을 위한 전당대회가 개막됐다.

 

정오경 발표된 제1차 투표결과는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였다. 1차 투표에 과반수 득표자가 없기 때문에 2시간 후 2차 결선투표를 한다면서 정회가 선포됐다. 당시 7층에서 진행된 전당대회 상황을 보려고 수많은 시민들은 전당대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2차 투표가 시작되기 전 김영삼 후보는 이기택 후보를 창가로 끌고 가서 “김영삼, 이기택 뭉쳐라! 저 민중의 함성을 외면하지 말라!”고 지지를 호소했고, 이 과정에서 김영삼 지지를 간곡히 호소하는 김대중의 쪽지가 이기택에게 전달되어 지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이기택은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게 된다.

 

한편 “대표와 총장이 합심하여 새로운 마포시대를 열자”라고 하면서 이기택에게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한 이철승은 신도환에게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당권의 절반을 달라는 요청에 합의를 하지 못했다. 

 

오후 2시경 투표가 시작되었고, 투표시작 약 5∼6분 후 다급해 진 이철승이 신도환의 요구를 받아 들여 신도환의 지지를 이끌어 내었으나 김영삼 승리의 분위기가 감지되어 가고 있었다.

 

오후 4시경 2차 투표결과가 발표되었다. 김영삼 378표, 이철승 367표. 김영삼의 극적인 역전승이었다. 장내는 열광하였다.

 

잠시 후 김영삼이 단상에 올라왔다. 수많은 언론사들의 플레쉬가 번쩍이는 가운데, “존경하는 의장, 그리고 친애하는 당원동지 여러분! 오늘은 진실로 위대한 민권승리의 날입니다. 나 김영삼은 십자기를 메고 골고다로 가는 심경으로 오늘의 당권경쟁에 나섰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옵니다. 반드시 민주회복을 위하여 이 한 몸 던지겠습니다.”라고 약 30분간에 걸쳐 승리의 사자후를 토하였다. 승자 패자 모두 부둥켜안으면서 축하하고 격려하였다. 유신체제의 종언을 예고하는 거대한 파노라마 였다. 

 

한국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1979. 5. 30. 신민당 전당대회는 김영삼-김대중이 연합한 민주혁명으로서 이 나라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찬란한 민주의 금자탑이다.

 


 

김영삼 승리 원동력은 김대중의 단합대회 참석

박정희, 차지철에 대한 김재규의 반감인 것으로 훗날 밝혀져

 

우리나라 민주역사의 새로운 서막을 예고한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의 김영삼 승리는 명실상부한 김영삼, 김대중의 합작품이었다. 당시 상황 및 세력 분포도 등에 비추어 단독 김영삼의 승리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전날 아서원에서 개최된 ‘민권의 밤’ 행사에 김대중이 참석하여 1시간 이상에 걸쳐 지지호소를 하였기 때문에 극적인 승리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당시 김대중은 1978년 12월 27일 가석방으로 풀려난 후 연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정당행사에 참석한다는 것은 중앙정부부장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김영삼의 승리를 우려한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를 시켜 출마포기 및 신변위협까지 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차지철 경호실장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지만 하였다. 이런 감정이 김영삼의 승리를 은근히 기대하게 하였을 것이다. 김영삼의 승리를 위해서는 당시 김영삼 단합대회에 김대중이 참석해 지지연설을 하는 것 달리 방법이 없었다.

 

“1979년 5월 30일의 신민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두고 김영삼측에서 중국집 아서원에 김대중(金大中)을 참석시키고 단합대회를 연다는 첩보가 있었다. 김부장에게, 이 단합대회에 연금상태에 있는 김대중을 가세시키면 이철승 지지파가 감화되어 불리하니 강권을 발동해서 김대중의 외출을 저지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으나 끝내 이를 방치하여 결국 정세가 김영삼에게 유리하게 진전되었다(합동수사본부에서 외사국장 진술 중 일부).”

 

또한 10월 26일 사건 일주일 전 김재규는 공관을 찾아온 김녕 김씨인 상공부 차관에게 “내가 공작을 해보니 김영삼씨를 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김대중씨의 연금을 그날 하루만 풀어준 것이야.”라고 말하면서 “누군가가 후세에 이 사실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 말해두는 거야”라고 말하기도 하했다.

 

역사의 운명을 바꾼 김영삼 승리는 이렇게 기묘하게 이뤄졌다. 이후 김영삼 총재의 가열한 민주투쟁의 결과로 10.26 사태가 발생해 유신체제가 종식되었다. 10.26사태는 김영삼 총재의 당선을 시발점으로 한 것이며, 김재규가 김대중에게 하루 동안의 외출을 허용해준 것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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