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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광주, 잔인한 사살 명령자는 ‘전두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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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국 기자
기사입력 2019-06-03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 사태의 하나인 1981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진압과정 및 발포명령권자 규명은 마지막 남은 현대사의 한 서린 응어리였다. 김영삼 정부 당시 특별법까지 제정해 강도 높은 수사를 했으나  최규하 대통령의 침묵 등으로 당시 발포명령자를 끝내 규명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 14일 광주 5‧18 기념문화센터에서는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미육군 501정보요원과 505보안부대 수사관으로 활동했던 김용장, 허장환씨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항쟁 기간 광주를 방문했고,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해 파란을 일으켰다. 이어 5월30일 5‧18당시 서울 공군 706보안부대장 운전병이었던 오원기씨가 광주지검에 출석해 “80년 5월21일 오전 전두환씨를 용산 헬기장에서 직접 봤다”고 진술하는 등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광주방문 사실을 구체화 했다. 이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역사적 진실을 고백해 현대사의 마지막 응어리를 풀어야 한다.

 

허무했던 ‘서울의 봄’…전두환 집권은 비극의 시작

 

1979년 10‧26 사태 이후,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참모총장 등을 체포하고 군권(실권)를 장악한 전두환을 핵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은 이후부터 당시 유력주자였던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향해 “김영삼은 무능하고, 김대중은 사상이 의심스럽고, 김종필은 때가 많이 묻었다. 대통령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전두환의 집권 공작을 은밀히 진행시켜 나갔다.

 

이런 신군부 집권공작의 흐름을 모르는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나름대로 집권을 위한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으며, 전국의 대학생들은 서울역 등에 모여 민주화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벌였다. 이런 도중 신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전국대학생 총연합회는 10만 학생들이 운집한 1980년 5월15일 집회에서 향후 집회중지를 결의하고 회군한다(일명 서울역 회군).

 

이런 학생들의 회군이 집권에 장애를 초래할 것을 우려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5월17일 정오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했고, 전두환은 이학봉 등에게 김대중‧김종필 등 정치인과 학생들의 연행방침을 극비리에 시달한다.

 

이후 17일 오후 9시경 집총한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상태에서 국무회의가 개최됐고, 전두환의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통과시킨 후,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하면서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다음 검거선풍을 일으킨다. 

 

17일 24시경부터 발효되는 비상계엄확대조치 직전,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김종필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됐고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은 체포당했으며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가택 연금됐다. 

 

제주를 포함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로 계엄사령관이 육군참모총장에서 대통령으로 변경됐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설치되며 전두환이 국보위 상임위원위원장이 돼 최종적으로 전두환의 집권이 공표됐다. 이렇게 서울의 봄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다음날인 18일 광주에서 신군부의 폭압적인 헌정중단 조치에 저항하는 자발적인 민중항쟁이 발생한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진압하는 모습 (사진제공=5.18기념재단)

 

그날 광주, 2만5000명 계엄군에 누가 ‘사살명령’ 내렸나

최규하 하야시키고 실권 잡은 전두환, 발포 명령자 규명 못했다 

 

1980년 5월18일 광주민주화 항쟁 발발 당시 정부 계선조직은 대통령 최규하, 국무총리 신현확, 국방부장관 주영복,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참모차장 황영시였다.

 

그 당시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 국보위 상임위원장 겸 국군보안사령관 육군대장이었다. 허수아비인 최규하 대통령에 어마어마한 실권자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명확한 권력구도가 정립돼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 항쟁 발발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중동 세일즈 외교를 위해 중동 외유 중이었다. 그는 항쟁 발발 후 분위기가 격화되자 5월20일 외유를 중단하고 급히 귀국해 광주 상공을 헬기로 선회하면서 항쟁중단의 선무방송을 했고, 그 다음날인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무력진압의 움직임은 시작됐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21일 오후 19시경 광주 지역의 시위를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사태’로 명명하면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연속해서 19시30분경에는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내용을 담은 외곽 봉쇄작전(작전지시 80-5호)을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렸는데, 계엄군을 외곽에 머물게 하면서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면서 본격적인 무력진압을 위한 숨고르기가 이뤄졌다. 

 

광주의 심장을 대대적으로 진압하기에 앞서 광주 외곽에서부터 시민 살상행위는 시작됐다.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 등이 여기에 해당됐으며, 24일에는 시민군과 계엄군 간에 2차례 오인 교전으로 계엄군 13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끝내 27일 새벽 역사에 길이 남을 잔인한 작전이 시작됐다. 2만5000명의 계엄군을 투입해 시민군들을 무력 진압하라는 ‘상무충정작전’이 하달됐고, 27일 새벽 2시경 광주 시내로 들어온 2만5000명의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과 시민들을 무차별 살상했다. 

 

계엄군이 무차별 사격 살상으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27일 새벽 5시22분경 시민군 생존자는 전원 체포·연행됐다. 연이어 27일 오전 7시30분부터 22시50분경까지 약 15시간여 동안 계엄군은 광범위한 가택 수색 등으로 관련자들을 상무대로 연행하면서 유혈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발포명령인 ‘상무충정작전’으로 광주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은 계획된 시나리오 따라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1980년8월15일의 일이다. 

 

이후 전두환은 제11대‧12대 대통령으로 연속 재임하는 기간 동안 공포정치로 일관하면서 광주민주화 항쟁을 ‘광주폭동’ 혹은 ‘광주사태’로 매도했다. 전씨는 저항정신에 입각한 숭고한 민주항쟁을 모독하고 폄훼하면서 역사적 죄업을 더욱 키우기만 했다.

 

비뚤어진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세우기 위한 움직임은 있었다. 

 

1993년 2월25일 김영삼 문민정부의 탄생 이후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김영삼 정부는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자금 관련사건으로 구속시키고, 같은해 12월3일 전두환 전 대통령도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시켰다. 

 

12·12사건과 5·18 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특별수사를 진행되면서 수사의 중요한 목적이 5‧18 광주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발포명령권자 규명 등 실질적 책임자를 밝혀내는데 집중됐지만, 끝내 마무리를 짓지는 못했다. 

 

장기간의 특별수사 끝에 ‘12·12사건은 군사반란이며 5·17사건과 5·18사건은 내란 및 내란목적의 살인행위였음’이 법적으로 규정됐지만, 핵심사안인 5‧18 발포 명령권자는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을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침묵과 전두환의 발포명령을 입증할 구체적 자료들이 확보되지 않아 역사의 어두운 숙제로 남겨졌다. 

 

다시 5월…5‧18 발포 명령권자는 다름 아닌 ‘전두환’

구체적인 증언들 쏟아져, 전두환은 스스로 역사적 책임져야

 

1980년 5월18일, 그날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 발표명령자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지금까지 전두환에 대한 ‘책임론’만이 난무한 상황에서, 발포명령자를 실체적으로 규명하지 못해 이는 현대사의 마지막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다시 5월, 응어리를 풀 증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 5월14일 5‧18 당시 광주에서 미육군 501정보요원과 505보안부대 수사관으로 활동했던 김용장‧허장환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항쟁 기간 광주를 방문했고,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구체적으로 증언해 ‘전두환이 실제적 발포명령자’라는 추정에 신빙성을 더했다. 

 

그러던 중, 다시 5월30일 5‧18 당시 서울 공군 706보안부대장 운전병이었던 오원기씨가 광주지검에 출석해 “80년 5월21일 오전 전두환씨를 용산 헬기장에서 직접 봤다”고 진술함으로써 ‘실체적 발표명령자 규명’에의 역사적 진전이 이뤄졌다. 

 

1980년 5‧18 광주항쟁 이후 무려 39년 만에 나온 쐐기였다.

 

5월18일 민주항쟁당시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었던 전두환은 실질적으로 전권을 행사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 광주항쟁 전후로 광주를 방문하는 등 발포를 명령했다고 할 만한 구체적 정황 등은 찾아내지 못하였다. 특히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등으로부터 발표명령을 협박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최규하 전 대통령마저 이 부분에 대하여 철저히 함구하는 바람에 진실은 역사의 언덕너머로 묻혀 버릴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김용장‧허장환‧오원기씨 등이 5‧18 당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광주방문 목격 등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진술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계엄사령관인 대통령이나 육군참모총장이 아닌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왜 광주항쟁현장에 은밀히 간단 말인가. 5월21일 전두환이 광주현장에 다녀온 이후 일사천리로 작전 지시가 하달되고, 1만여발의 총탄이 시민군들에게 발사되는 ‘상무충정작전’으로 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됐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전두환은 5‧18. 광주시민군들에 대한 발포사실을 겸허히 고백해 가신 임들의 영혼을 위무해야할 역사적 책임이 있다. 한때 전 대통령으로써, 그는 현대사의 마지막 응어리를 자신의 손으로 풀어내야만 한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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