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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의사와 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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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
기사입력 2019-06-17 [08:47]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의술은 인술(仁術)이란 말이 있다. 소의(小醫)는 몸의 병을 고치고, 중의(中醫)는 마음의 병도 고치고 대의(大醫)는 세상의 병을 고친다는 말도 있다. 인간에게 이익을 주는 기술이 한둘이 아닌 데 오직 의술에 대해서만 이런 찬사와 기대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인간에게 질병과 고통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고,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병이 나면 아프고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아픈 것을 싫어한다. “사람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는 것은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바로 느낀다.” 철학자 셸러(Max Scheler)가 파스칼의 말을 인용해 주장했다. 사람이 기쁨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기쁨 추구와 고통 회피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J. Bentham)은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란 두 절대적인 주권의 통치하에 두었다. 그들만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지적하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통과 쾌락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는 주장이다. 과장된 표현 같지만, 설득력이 있다. 

 

물론 쾌락 추구와 고통 기피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순교자 등의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고통을 제거하지 않고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얼른 생각하면 즐거움이 고통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지만, 실상은 고통 기피가 즐거움 추구보다 더 시급하다. 즐겁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아프지만 않았으면 하는 것이 대부분의 소원일 것이다. 고통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급선무다. 

 

물론 고통은 육체적인 아픔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하는 고통이 육체의 아픔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원초적인 형태는 역시 육체의 아픔이고, 그 아픔이 계속되는 한 정상적인 삶은 영위하거나 삶의 질이 높을 수 없다. 육체의 아픔은 정상적인 삶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건전한 영적 활동도 어렵게 한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모든 정상적인 삶의 전제 조건이다. 

 

물론 몸은 자생력이 있으므로 환자가 잘 관리하면 병이 스스로 나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그런 주장을 증명해 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형태로 치료 행위가 이뤄졌고 치료자, 즉 의사가 있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말씀하셨다. 환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고 죄인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철학자 키르케고르(S. Kierkegaard)는 그의 책 《철학적 조각들》(집문당, 1998)에서 교육자로서의 소크라테스와 구주로서의 예수님을 대조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 모든 것에 대한 이념(ideas)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교육자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지식을 제자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방법을 산파술이라고 하는데, 산파는 산모가 아기를 낳도록 도와줄 뿐 아기를 만들어 넣어 주지 않는다. 그런데 구주이신 예수님에게는 제자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그 죽음에서 해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었다는 사실 자체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구주께서 죄인들에게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가르쳐 주고 그 상황에서 해방해 주어야 한다. 

 

의사는 산파와는 다르다. 환자가 스스로 병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해 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사에 비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정상적으로 만들고, 그것은 나아가서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비정상적으로 만든다. 죄에서 해방되어야 인간의 삶이 정상화된다. 마찬가지로 질병도 비정상적인 상태다. 치유해야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영적인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것처럼 의사의 치료는 육체적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단순히 고통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삶이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물론 바울이 가졌던 ‘육체의 가시’처럼 육체의 질병이 영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예외의 경우일 뿐 일반화하는 것은 지나치다. 바울도 디모데의 육체적인 건강에 관심을 가졌다. 육체의 아픔은 일단 제거되어야 한다. 

 

물론 모든 기술은 인간의 삶에 이익을 준다. 그러나 의술은 다른 기술과 다르게 육체를 가진 인간이 땅 위에서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의사는 다른 기술자와 다르고, 달라야 한다. 요즘 의료인들이 그들의 기술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취급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 매우 실망스럽고 안타깝다. 그것은 자신의 지위를 격하하고 그 중요한 치유 행위의 가치를 폭락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의료인들은 다르기를 바란다. 그들이 받은 달란트와 훈련은 엄청나게 큰 가치가 있으며 그들의 소명은 신성하리만큼 크다는 것을 절감했으면 좋겠다. 질병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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