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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모르고는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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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
기사입력 2018-04-02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한때 한국 교회 목회자들 사이에 “쩍쩍 하는 자들”이란 표현이 유행했다. 좀 배웠다 하는 자들이 ‘신학적’, ‘사회적’처럼 ‘~적’(的)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아냥거림이었다.

 

학자들은 주로 추상명사 뒤에 ‘적’자를 붙여서 형용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 번역 성경에는 ‘적’이란 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성경이 학문적인 책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어쨌든 학자들을 ‘적’이란 표현과 연결하는 것은 매우 재치 있는 관찰이고, 기독교에서는 학문의 위치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그렇게 틀린 지적이 아니다. 학자들이 자랑하는 이론적 지식이란 겨우 “세상의 초등학문”(갈 4:2, 9; 골 2:8, 30)이며 “십자가의 도”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세상의 “지혜”(고전 1:21)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가 언급했던 초등학문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면서 비판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는 매우 무책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바울은 그런 초등학문이 바른 신앙과는 전혀 무관하므로 방관해 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무관했다면 그런 것에 대해서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무책임하지도 않았고, 세상의 초등학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며 무시해 버리지도 않았다. 바울 사도는 그 시대의 철학을 비교적 잘 알았고, 그것이 신앙에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경고했다. 그리스도인이 하늘나라에 가거나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특별한 공동체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을 무시할 수 없다. 아는 수준을 넘어서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잘 알아야 한다. 모르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것에 감염될 수 있고, 모르고 배척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효과도 없거니와 오히려 기독교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학문에 의하여 형성된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젖어 있는 현대인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도 없다. 한자성어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백 번 이긴다”(知彼知己 百戰百勝)는 말이 있지 않은가.

 

초대교회 속사도(續使徒, Apostolic Father)들은 그 사실을 잘 인식했다. 유스티누스(Justinus), 오리게네스(Origenes),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 등 초대교회 교부들은 그 시대의 학문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소유했고, 한편으로는 불신 사상의 공격으로부터 십자가의 도를 변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과 신앙고백을 위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신학이다. 이렇게 시작된 기독교의 학문 활동은 면면히 이어졌고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같은 대 사상가도 배출했다. 만약 칼뱅이 당대 학문에 무식했다면 《기독교 강요》를 쓸 수 있었을까? 만약 루터가 신학 교수가 아니었다면 95개 조항을 제시하면서 감히 천주교 신학자들과 토론을 제안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현대 교회가 대항해야 하는 세상의 초등학문은 초대교회 때보다, 칼뱅과 루터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해지고 세련되어 있다. 이들을 상대로 하는 것은 실로 버거운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초대교회가 처했던 세상의 세계관은 지금에 비하면 자연에 대한 훨씬 더 원시적 반응이었고, 그나마 세련되었다 할 수 있는 헬레니즘도 오늘의 문화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단순했다. 그런 세계관, 그런 초등학문을 이해하고 비판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세계관과 현대 학문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렵다.

 

학문도 역사적 산물이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많이 축적되고 그 축적된 것 위에 새로운 것이 개발되게 마련이므로 그만큼 더 복잡하고 난해할 수밖에 없다. 현대의 세계관은 온갖 종교와 사상, 그리고 그동안 발전을 거듭해 온 다양한 학문의 영향까지 받아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복잡하다.

 

오늘 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자연과학과 그것을 기초로 해서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이다. 최근에는 과학과 과학기술이 경제적인 이익과 손을 잡고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대 과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심각하게 도전하고, 자본과 기술은 절제를 요구하는 경건 생활에 큰 방해가 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세력들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비록 현대 문화의 모든 요소가 다 기독교 신앙에 적대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그것들을 무시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는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이런 상황에 처한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쩍쩍” 하지 않아도 아무 해를 당하지 않는다면 오직 좋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무책임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위험에 처하면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아 버리는 타조의 전략과 다르지 않다. 

 

물론 기독교인의 학문적 노력을 단순히 세상 학문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기 위한 것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 학자들도 다른 학자들 못지않게 세상 학문을 열심히 연구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며 새로운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그렇게 함으로 자연과 인간,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학자는 불신 학자들보다 오히려 더 창조적으로 학문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절대로 수용하기 때문에 사람이 제시한 모든 다른 이론들을 상대화할 수 있고, 따라서 비판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절대가 없으면 절대가 아닌 것이 절대 자리에 앉게 되어 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불신 학자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이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우수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이미 성경의 패러다임에서 멀리 벗어난 세속적 패러다임에 서 있는 현대 학계에서는 지극히 어려운 작업임이 분명하다.

 

거대한 물결을 거슬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학자들에게 “쩍쩍 하는 자들”이라고 비아냥거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용기를 갖도록 응원해 줘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적대적 세력으로부터 성경적인 신앙을 방어하기 위해 최전방에 서 있는 전투병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이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다른 그리스도인 학자들과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 북돋우고 자극함으로써 학문적 비판과 창조적인 연구가 촉진되고 축적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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