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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새끼 새 같던 날 / 김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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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선
기사입력 2018-04-23

새끼 새 같던 날

 

땡볕 속 밀을 베다가 벌에 쏘여

아버지 얼굴이 메기처럼 부어올랐다

낯설어 자꾸 쳐다보는 나를 보며

아버지가 웃으시는데,

떨어지는 해까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아버지의 재빠른 낫질이

사마귀처럼 밀밭을 먹어치우는 내내

얼굴 일그러진 아버지는 낯선 아저씨 같았다

어미 노고지리가 하늘로 솟아오를 때

나는 둥지를 찾아 새끼 새를 날려 보냈다

 

밀밭 낫질이 다 끝날 즈음

아버지 부은 얼굴도 가라앉고

지계 발목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깨가 기울어진 그림자 뒤로

종종거리는 작은 그림자가

마지못해 천천히 따라갔다  

 

# 어떻게 “아버지는 웃으실 수가” 있단 말인가? 아팠을 텐데, 얼마나 아팠을 텐데, “웃으시”다니. 벌에 쏘여본 사람은 안다. 벌에 쏘인 얼굴은 금방 “메기처럼 부오 오르”고 주저앉을 만큼 아플 뿐 아니라, 어지럽고 메슥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벌에 쏘였을 때 엄마가 발라주셨던 된장도 없는데, 그저 어쩔 줄 몰라 “메기처럼 부어 오른” 아버지 얼굴이 “낯설어 자꾸 쳐다보는 나를 보며” 웃으시다니. 그 뿐이랴, 퉁퉁 부어올라 “일그러진”얼굴을 하시고도 “아버지의 재빠른 낫질”은 조금도 쉬지 않고, “사마귀처럼 밀밭을 먹어치우”고 있는 것이다.

 

“벌에 쏘인” 어린 시인의 아버지라고 왜 아프지 않으셨으랴. 아버지는 어린 아들 앞에서 불시에 닥친 재앙에 대처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역할기대(role expectation)란 그가 가진 지위에 어울리는 행동양식을 ‘요구하거나’ 또는 ‘예상하거나’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할기대에 적응하는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행동규범을 구축하게 한다. 벌에 쏘이는 불시의 상황에서도 울거나, 주저앉거나, 하던 일을 포기하지 않고 “밀”을 다 베셨던 아버지의 행동은 어린 아들에게 각인되어 모델모방으로 동일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후 거울을 들여다보라. 거울 속 아버지께서 마주보고 계실 것이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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