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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처서기 / 박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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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선
기사입력 2018-09-17

처서기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레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윗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은 깨어 있다가

저 우레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벌레소리가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그 맑은 아침에 비로소 잠이 들겠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 아침에 비로소

나는 잠이 들겠다.

 

# ‘귀밝이술’을 마신듯 한 시간을 건너고 있다. “자정을 넘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 수시로 잠에서 깬다. “깊은 밤” 퍼뜩 눈을 뜨면, 바람결에 가는 모래가 흩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불을 켜면 발이 여러 개 달린 벌레가 벽을 지나다가 흠칫 놀라 재빨리 책장 사이로 숨어든다. 나도 놀라 잠시 숨을 고르면 귀는 더욱 더 크게 열리어 발이 긴 벌레의 행방을 좇게 된다. 마루로 나와 물 한잔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누우면, 길고양이가 덧신을 신은 채 카펫 위로 걸어가는 것 같은 발걸음으로 창문 아래를 지나고 있다.

 

길고양이도 잠자리에 든 새벽 두 세 시쯤엔 뒷산 굴참나무 가지 사이로 소쩍새가 두 손을 둥글게 말아 귓속말을 하듯 ‘소쩍, 소쩍, 소쩍쩍’ 운다. 소쩍새 소리에 귀를 모으고 몸을 뒤척이다보면 희부연 빛이 창문에 어른거린다.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서면, 마당 한 귀퉁이에서, 둔덕에서, 비탈에서, 수풀 속에서, 나무 가지에서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윗소리로,/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파닥거리는 시늉으로”,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소리를/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가을이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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