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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따뜻한 한 그릇의 말 / 심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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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선
기사입력 2018-10-02

따뜻한 한 그릇의 말

 

머리의 부스럼을 긁듯 길 떠난 지 오래된 저녁에

처음인 거리의 식당에 앉아 중얼거린다

껍질이 벗겨진 말들을 뱉는다

목구멍에서 말이 분비되는 증상이 있더니

의사의 처방은 역류성식도염이었다

집을 떠나기 전이었다

 

식은 죽조차 먹지 못하고 한 달을 누워 있던 아버지

지난겨울 가시기 전에 마지막 장작으로 불 지펴

들릴 듯 말 듯한 밥 한 그릇을 지어주셨다

늦도록 외롭지 않게 살아라

 

그때에는 귀에 담지를 못하여 손에 움켜지지도 못하여

금세 식어버릴 것 같은 한마디 밥을

서둘러 꿀떡 삼켜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집을 떠나 멀고 혼자인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그 말이

헐어버린 식도에 여태껏 걸려 있는지 중얼거리면

왜 그 말은 껍질도 없이 오래 아플까

아픈 무릎을 만져보는 오늘은 가슴 한가운데가

체한 것처럼 흐리다

 

# “이놈우 자식이 미쳤나. 와 이카노 와 이캐 응?” 비명소리를 내며 길바닥에 개구리처럼 뻗은 창식이를 마구 깔고 문대는 아들 동길이를 본 동길이 아버지는 후다닥 광고판을 던지고 하나 남은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턱에 붙었던 ‘흰 종이수염’이 가슴 앞에 매달려 너풀너풀 춤을 추었다. 

 

사친회비가 밀려 교실에서 쫓겨났어도 동길이는 울지 않았다.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만 돌아오면 그깟 사친회비쯤이야.... 그러나 어리숙하고 무력한 시골목수였던 동길이 아버지는 6.25 전쟁 통에 팔 하나를 잃고 돌아와 아들의 밀린 사친회비와 식솔들 생계를 위해 ‘흰 종이수염’을 붙이고 극장광고판을 메고 다니며 아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동길이 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의 슈퍼맨도, 모델모방의 대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동일시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더 이상 자신의 우상도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 아버지의 말씀은 “귀에 담지를 못하여 손에 움켜지지도 못하여” “서둘러 꿀떡 삼켜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우상화 시켰던 아버지를 인간 그대로의 아버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때이건만, “그때에는” 너무 어렸거나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아들 자신이 성숙하지 못하였던 때였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세상 뜨시기 전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늦도록 외롭지 않게 살아라”며 지어 주셨던 “따뜻한 한 그릇의 말씀”이 아들도 아버지 나이가 되어서야, “왜 그 말은 껍질도 없이 오래” 아픈지 알게 되는 것이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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