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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수치도 죄의식도 사라지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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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
기사입력 2018-10-02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4대 미덕은 지혜, 정의, 용기, 절제였고, 유교의 4대 미덕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였다. 공통되는 것은 지혜와 정의인데 이 둘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했고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맹자는 정의를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 羞惡之心)이라 하였다. 철두철미 주체 중심적 유교 윤리에서는 정의도 전적으로 주관적인 태도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심리학자 톰킨스(Silvan Tomkins)는 “수치-창피”(shame-humiliation)는 모든 인간의 생득적 정서(affects) 9쌍 가운데 매우 강력한 하나라고 했다. 비록 무엇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왜 부끄러워하는가는 개인과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에게 양심과 수치심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수치심이 사람에게 해롭다는 주장도 있지만 맹자가 사단의 하나로 취급할 만큼 수치감은 악행을 억제하는 중요한 도덕적 자원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후안무치: 厚顔無恥)라 하고, 심지어는 “쇠가죽으로 된 얼굴”(철면피: 鐵面皮)이라 욕한다. 최근 우리나라 정치계와 종교계에는 그런 후안무치한 철면피들이 들끓어 도덕적 후진국을 만들고 있다.  

 

사람이 후안무치하게 되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원인이 작용하는 것 같다. 하나는 개인의 양심이 마비되어 옳고 그름을 가릴 만한 판단력을 잃는 것이다. 그것은 머리가 나쁘거나 객관적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욕심이 눈을 가려 나쁜 것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고 옳은 것이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친 사람들 상당수는 좋은 두뇌를 가지고 좋은 교육을 받았고 그 가운데는 천재란 칭송을 들은 자도 있다. 그러나 돈, 권력, 명예에 눈이 멀면 양심이 마비되어 좋은 두뇌가 아주 효과적인 악의 도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원인은 사회문화가 잘못되어 도덕적 수준이 높은 사회에서는 충분히 수치 거리인 행위가 전혀 부끄럽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거짓말이 예사로 인식되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것이 별로 부끄럽지 않고, 탈세하는 사람이 많으니 탈세가 부끄럽지 않은 것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는 최순실의 위치에 있었다면 최순실처럼 행동했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최순실은 자신의 비리에 대해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것 같다. 자기만 “재수 없이 걸렸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양심의 가책과 수치를 유발하는 잘못의 기준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다. 최근 한 언론사가 예약 지키기 운동(No-Show 근절 캠페인)을 벌인 결과 예약 지키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죄의식의 문화”(guilt culture)와 “수치의 문화”(shame culture)를 구별해 왔다. 베네딕트(Ruth Benedict)가 일본 문화에 대해서 쓴 《국화와 칼》(을유문화사, 2002)이란 책을 통해서 많이 알려진 분류다. 일본, 한국, 중국 같은 동양문화에서는 수치심이 일탈행위를 억제시키는 반면, 서양 문화에서는 죄의식이 그런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수치의 문화에서는 다른 사람의 따돌림을 무서워하고 죄의식의 문화에서는 인격적인 신이나 보응의 법칙에 의한 처벌을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수치는 주로 다른 사람 앞에서 느끼는 것이므로 무신론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문화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윤리적 자원이다. 따라서 잘잘못의 기준은 하나님의 계명이나 우주 법칙이 아니라 그 사회가 형성해 놓은 규범이다.   

 

수치의 문화에서 수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매우 유기적이고 인간관계가 친밀해야 한다. 우리나라 전근대 사회의 질서가 비교적 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념적으로 동질적이고 인간관계가 친밀했기 때문이었다. 인구이동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한곳에서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모두가 서로를 잘 알고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았다. 따라서 그런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죽음 못지않게 심각한 처벌이었다. 일제 강점기 굶는 사람이 많았을 때도 대문과 잠을 쇠가 없는 시골 마을에도 도둑이 거의 없었다. 공동체 구성원간의 상호신뢰를 도둑질로 배신하면 따돌림을 당할 것이고 그것은 심각한 수치 거리였다.

 

그러나 사회가 기계적으로 조직되고 인간관계가 익명적이 되자 수치는 윤리적 기능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는 죄의식의 문화보다 수치의 문화가 훨씬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죄의식의 문화에서는 인간관계가 익명성을 띠어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감시하는 “마음속의 경찰”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지만, 수치의 문화가 익명적이 되면 행동을 감시하는 “다른 사람의 얼굴”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범죄하고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고 하거나 청문회에 불려 나온 증인들이 예사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거짓말하는 경우는 죄의식의 문화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다.  

 

놀라운 것은 인격적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수치의 문화에 살면 부정직해진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평균적으로 유럽이나 미국의 비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부정직한 것 같다. 이것은 세계관과 문화가 개인의 윤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잘 보여 준다.  

 

물론 죄의식의 문화에서도 요즘 무신론이 확산되어 “마음속의 경찰”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두 문화에서 모두 법의 강제력만이 정의유지의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자율성에 있는데 외부의 압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변화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음속의 경찰로 모시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서 이렇게 타락하는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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