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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약자와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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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
기사입력 2019-05-06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이 세상에 고통만큼 심각한 것은 없다. 고통이 심각하다고 하기보다는 ‘심각’이란 말의 뜻이 고통의 경험을 통하여서 인식된다 해야 할 것이다. 고통은 쾌락과 함께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다. 다른 어떤 경험으로도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왜 인간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이 세상에서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욥의 고통 해결 방식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지 고통에 대한 문제의 대답은 아니다. 

 

고통과 관계해서 인간이 우선해야 할 것은 그것을 예방하고, 줄이고 극복하는 것이다. 고통이란 현상 자체가 이미 그런 요구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며 당위(當爲)라 할 수 있다. 사실 인류 문화는 고통을 제거하는 과정과 그 결과의 축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가 고프지 않았더라면 농업이 없었을 것이고 아프지 않으면 의학과 의료기술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과거에는 주로 가뭄, 홍수, 폭풍, 맹수, 맹독, 질병 등 자연현상이 사람을 괴롭혔다.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류는 기술, 과학, 과학기술을 개발했고, 상당할 정도로 성공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연 대신 인간과 인간 사회가 인간을 아프게 한다. 그리고 인간이 가하는 고통은 자연이 가하는 고통보다 더 크고 더 잔인하다. 근대에서 가장 큰 자연재해는 1931년 중국에서 발생한 홍수로, 4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나치정권은 유대인 600만 명을 재판도 없이 살해했고, 1, 2차 세계대전에서 2,0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나치 군인들은 유대인 유아를 축구공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자연은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다. 

 

인간이 가하는 고통은 거의 대부분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고통을 가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가하고, 욕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가한다. 개인의 악도 심각하지만 집단의 악은 훨씬 더 심하다. 미국 신학자 니버는 그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대한기독교서회, 2003)에서 개인은 양심, 합리성, 체면, 위선 등의 도덕적 자원을 가지고 있기에 어느 정도 도덕적이 될 수 있으나 사회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훨씬 더 비도덕적일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즉 집단이기주의가 개인이기주의보다 훨씬 더 강하고 잔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주는 고통은 거의 대부분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삶에서는 약자가 강자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강자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경우는 드물고 거의 대부분 복수나 처벌을 받는다. 그리고 한 사회의 윤리나 법질서가 파괴되면 약자들이 주로 그리고 먼저 그 피해자가 된다. 교통질서가 무너지면 탱크나 덤프트럭 기사는 마음대로 달릴 수 있으므로 오히려 덕을 본다. 다른 차들이 다 비켜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행자나 자전거, 손수레 등은 아예 길에 나갈 수도 없다. 부패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부패하면 강한 사람은 뇌물 등으로 더 강해질 수 있으나 약자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세계은행은 부패란 “배고픈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는 것”이라 했다. 사회계약설을 주장한 홉스는 약육강식(“사람이 사람에게 늑대”- Homo homini lupus)을 막기 위해서 국가가 필요하다 했다. 국가의 기본 목적은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고 정의의 핵심은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모든 윤리는 정의로 환원되기 때문에 윤리의 궁극적 목적도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주로 사람이 자신의 게으름이나 무능으로 약자가 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 사회적 원인에 의해서 약자가 생겨난다. 강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능력이나 부지런함도 작용하지만 사회의 제도와 시대적 상황 덕으로 강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양복 재단사가 돈을 벌었지만 지금은 도태되고, 싱거운 말 잘하는 사람은 과거에는 부자가 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게그맨이 되어 떼돈을 번다. 그러므로 약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사회, 특히 강자가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  

 

일반적으로 정의는 공정성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성경은 좀 더 구체적이다. 하나님은 고아, 과부, 객 (이스라엘 주민 사이에 끼어 사는 이방인)을 보호하라고 명령하시고,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다. 고신대 전 총장 고 이근삼 박사는 기독교적 정의를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끈질긴 편애”란 말로 표현하였다.

 

정치철학자 롤스(John Rawls)는 그의 《사회정의론》(서광사, 2001)에서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인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것”(the greatest benefits to the least advantaged)이다. 즉 약자 보호가 정의란 것이다. 

 

에로스에 근거한 세속적 윤리는 행위자 자신이 얼마나 올바른 동기에 근거하여 덕 있게 행동하는가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아가페에 근거한 성경의 윤리는 행위자 자신이 아니라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가에 초점을 모은다. 십계명의 윤리적 계명이라 할 수 있는 4계명에서 10계명까지가 모두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할 이웃은 우선적으로 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비도덕적 행위의 제일 큰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비윤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벧전 2:11)을 제어하지 않고는 윤리적이 될 수 없다. 바울은 “탐심은 우상 숭배”(골 3:5; 엡 5:5 참고)라 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 특히 그리스도인은 탐심을 제어해야 한다. 독일 신학자 그룬드만은 헬레니즘이 강조한 절제는 자신의 인품을 고상하게 기르기 위함이고, 성경이 가르치는 절제는 이웃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했다. 이것은 아가페 사랑에 근거한 절제며 십자가의 도를 반영한 것이다. 

 

2017년에 일어난 최순실 사건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폭로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부패를 막아서 약자들을 보호해야 하고 우리 자신들부터 절제해야 한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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