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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로잔 언약과 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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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
기사입력 2019-06-10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로잔 회의가 <로잔 언약>(Lauzanne Covenant)을 발표해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자극을 주었다. 성경의 권위, 전도의 특성, 세계 선교의 중요성과 긴급성,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문화의 문제들, 영적 전쟁 등에 관한 복음주의의 입장을 제시한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이미 많은 관심을 쓰고 있던 사항들이었지만, 한 가지 예외가 언약 5장의 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에 관한 언급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이루시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억압받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등한시한 것과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를 상반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을 회개한다.”

 

이로써 로잔 언약은 사회적 책임에 관한 한 ‘복음주의’를 전통적인 ‘개혁주의’와 매우 가깝게 만들었다. 개혁주의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인데, 하나님이 온 우주의 절대권자라면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그분의 통치를 받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며 동시에 세계관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복음주의는 그동안 사회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한 것이 사실이다. 영혼 구원에 전력을 기울이고 병든 사람, 강도 만난 사람들을 돌보라는 명령에는 어느 정도 순종했으나 사회정의에 관해서는 관심을 많이 두지 않았다. 성경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사회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에는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주로 자연에 의해 결정되었을 뿐 사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19세기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것 같은 ‘사회’를 인식하지 못했고, 우리나라에서는 1800년까지 ‘사회’란 단어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과학과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인간 공동체가 인위적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면서 사람의 삶은 점점 더 사람과 사회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했다. 땅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다가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배달되는 수돗물을 마시게 되었다. 자연의 변덕과 위협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어 삶은 많이 편리해졌지만, 이제는 자연의 자리에 들어선 사람과 사회가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행복을 파괴하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불행하게도 사람과 사회가 행사하는 힘과 그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물론 자연도 항상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은 인간은 차별을 없애지 못했고, 때에 따라서는 차별을 확대하기도 했다. 옛날에는 중병에 걸리면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죽었지만, 지금은 선진국 국민이나 돈 있는 사람은 살아남고 후진국 국민이나 가난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누릴 수 있는 행복과 당해야 할 고통에서 차이가 더 벌어진 것이다. 

 

과거에는 약자가 고통을 당해도 그것이 대부분 자연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항의할 수도 없었고 항의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 자연의 힘은 비록 변덕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사람을 의도적으로 차별대우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고통과 불행을 모두 ‘운수소관’으로 수용하고 크게 억울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4분의 3은 다른 사람과 사회에 의해 가해지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약자다. 그리고 약자가 당하는 고통은 우연히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강자들이 그에 상응하는 쾌락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사회정의의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에, 특히 강자와 약자 사이에 불공정한 관계가 생기고 사회 평화가 깨어지는 것이다. 정의의 문제가 대두되고 억울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간 간, 특히 사회적 강자와 약자 간의 불평등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기에 시대마다 그 시대가 필요한 메시지를 준다. 이렇게 사회가 중요해진 오늘날에도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바로 고통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라는 것이다. 로잔 언약은 바로 이 시대에 주는 성경의 메시지를 찾아낸 것이다. 

 

밀 (J. S. Mill)이 지적한 것처럼 정의에 대한 인식은 먼저 부정의(injustice)를 인식함으로 일어난다. 즉 부정의가 있기에 정의가 요구된다. 불행하게도 모든 시대에 억울함이 있고,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억울함에 민감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고아와 과부가 억울함을 많이 당했기에 그들의 신원을 무시한 관원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예수님 시대에는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세리처럼 사람들의 무시를 받은 사람들이 약자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으셨다.

 

돈이 우상이 된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힘들고 약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들의 아픔에 민감해야 하고 이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제도를 고칠 책임이 있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가난한 나라와 그 국민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하고, 가난한 나라의 고통이 더 크므로 더 큰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요즘 아프리카나 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에서 한국의 기독교 구호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그 임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가난해져야 한다. 낮아지고 검소해야 남을 더 잘 위로하고 도울 수 있으며, 정의로운 제도와 문화를 조성하는 데도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 한국 국민이 크게 감동한 것은, 그가 높아지고 사치할 수 있는데도 낮아지고 검소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진심과 평소 삶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는 한국 교회가 그로부터 많이 배워야 한다. 지금의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로잔 언약에 충실하기에는 지나치게 부요하지 않나 한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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