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손봉호의 시대읽기] 가정이 건강해지려면

가 -가 +

손봉호
기사입력 2019-08-05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어떤 기독교 단체가 큰 집회를 준비하면서 C.C.C.(대학생선교회) 창립자 빌 브라이트 박사를 주 강사로 초청했다. 브라이트는 자기의 스케줄을 훑어보고는 정중하게 그 초청을 거절했다. 그 시간에 자기 아들과 농구를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가 과연 세계적인 기독교 단체인 C.C.C.의 총재에게 적절한가?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거절을 의아하게 생각할 것 같다. 수많은 사람의 영적 이익보다 자기 아들과의 농구 놀이를 더 중요시하는 것은, 브라이트 박사 정도의 영적 권위와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는 좀 무책임한 행동이 아닌가? 자기 아들 한 사람과의 약속은 연기할 수 있지만, 수많은 사람의 시간을 조정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나는 아들과의 농구 약속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모임에 차질을 가져오는 일은 하지 못할 것 같다. 실제로 나는 대개 공적인 행사를 위해 가족과의 약속은 주저하지 않고 연기하거나 파기했고, 그 때문에 마음 아파한 경우도 별로 없었다. 

 

브라이트 박사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브라이트의 결정은 우리가 당연하게 수용하는 상식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성해 볼 계기는 될 것 같다. 

 

(1) 이제까지 우리는 가족을 나 자신의 연장이라 생각하고,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보다 덜 중요하게 취급해 왔다. 그래서 가족과의 약속을 어기거나 바꾸는 것을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어기거나 바꾸는 것처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많이 달라졌고 우리도 달라져야 한다. 가족은 이미 나의 연장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들이며 따라서 가족들은 모두 나의 의무와 희생에 동참해야 할 의무가 없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여 부모의 부속품이 될 수 없으며, 부부일체라 하여 아내가 무조건 남편의 뜻에 따르던 시대는 지나갔다.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할 의무가 있으나 무조건 명령할 권리는 없고, 자녀는 일정 한도 내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가 늙으면 보양할 의무가 있으나 모든 일에 다 순종할 수는 없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은 각각 고유한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이를 바로 인식하고 존중할 때만 건강한 질서와 화목이 가능하게 되었다. 브라이트에게는 아들에게도 신실할 의무가 있으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먼저 약속했기에 아직 약속하지 않은 수천 명의 교인보다 약속한 아들에게 더 큰 의무가 있는 것이다. 

 

(2) 브라이트 박사가 겨우 농구 때문에 중요한 기독교 단체의 집회 강연을 포기하는 것을 과연 균형 잡힌 판단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가족과의 놀이가 가진 가치와 기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 가정들은 그 자체의 목적과 의미를 지닌 공동체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모들은 생업에, 자녀들은 공부에 찌들어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교회 출석과 QT, 봉사 시간까지 보태어 정신없이 바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에 더 잘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탐욕을 채우고 경쟁에 이기기 위해 아귀다툼을 한다. 가정들은 마치 군인들이 전투 중간에 잠깐 쉬면서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예비 사단과 비슷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심각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휴식이나 놀이니 하는 것이 끼어 들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일하도록 만드셨다. 우리는 일하지 않으면 녹슬고 약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탐욕을 채우기 위해, 경쟁에 이기기 위해 과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는 없다. 성경은 부지런히 일하기를 요구하면서도 놀랍게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라고 명령한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가족들,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심지어 가축들까지 쉬라고 하셨다. 단순히 다음 엿새 동안 일하기 위해 쉬는 것이 아니라 그날을 축제일로 즐기란 것이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가족들과 함께 벌일 영원한 잔치를 미리 맛보란 것이다. 일하기 위해 쉬란 것이 아니라 쉼 자체를 위해 쉬란 것이다. 

 

생업이나 공부, 출세, 경쟁과 무관하게 단순히 즐기기 위해 가족끼리 노는 것은 가정의 건강을 위해 중요하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도와줄 것을 믿는 사람들끼리 모든 긴장을 풀고 이해에 관심 없이 즐겁게 노는 것은 잠시 맛보는 천국이며, 가족과 가정의 건강을 위해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보약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손녀가 한데 어울려 윷놀이를 하면서 아무 대가도 없는 승리를 위해 마음껏 왁자지껄 떠들 수 있다면 그 가정은 이미 건강하거나 곧 건강해질 것이다. 같이 여행하거나 경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며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가정이 건강해야 생업과 학업이 보람차고 효율적이 될 수 있다. 일만 하고 엄숙하기만 하면 가정이 병들 수밖에 없다. 가족끼리의 즐거운 놀이가 큰돈이나 좋은 성취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관련기사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ins_news3/ins_mobile/data/ins_skin/l/news_view.php on line 79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URL 복사
x

PC버전 맨위로

Copyright ⓒ 문화저널2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