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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 스토리] 높이 날지못한 작은새, 비운의 복서 김득구

춥고 배고팠던 한과 응어리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김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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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 기자
기사입력 2019-11-22

 '미국을 다녀오면 새 집을 가질수 있다'던 김득구

 

지난 11월 18일은 프로복서 故김득구가 82년 11월 14일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을 벌이다 챔피언 레이 맨시니에게 14회 KO패 당한 후 99시간 사경을 헤멘 끝에 산화한 역사적인 날이다.

 

1930년 김정연, 1959년 송재구, 1973년 문정호에 이어 발생한 1982년 김득구의 참사는 이후 벌어진 98년 이동춘, 2008년 최요삼, 2010년 배기석과 함께 국내 복서의 링 참사 희생자 명단에 등재 되었지만 김득구는 여느 복서보다 가장 가슴 아픈 사연과 곡절을 품고 하늘의 별이 되었기에 더욱더 애틋하다. 

 

가끔씩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故김정호의 ‘작은새’ 란 곡의 가사를 음미해보면 김득구가 떠오른다. “길잃은 새 한마리 길을 찾는다. (중략) 세상은 밝아오고 달마져 기우는데 수만리 먼 하늘을 날아가려나. 가엾은 작은새 는 남쪽하늘로 그리운 집을 찾아 날아만 간다.” 

 

▲ 결전을 앞둔 김득구 의 국내에서의 마지막사진 (사진=조영섭 기자) 

당시 그는 봉천동 연립주택을 사기 위해 중도금 300만 원을 불입한 상태에서 ‘미국을 갔다 오면 내 집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며 맨시니와의 경기에서 배수진을 치고 작은새 처럼 수만리 머나먼 길을 날아갔지만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왔다.  

 

당시 그의 자취방에는 ‘3년을 3일로 생각하며 땀과 피의 결정체를 만들겠노라’ 하는 비장한 각오로 쓴 격문이 있었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의지를 담은 또 다른 표현 이었으리라.   

 

도봉구 창동에 살고 있던 당시 21살의 Y모양과 그해 6월 5일 약혼식을 올린 예비 신랑인 김득구는 챔피언이 된 후 결혼식을 근사하게 치를 청사진도 준비 중이었기에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사투를 벌였다. 

 

그는 1982년 11월 14일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팰리스호텔에서 벌어진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24승(19KO) 1패의 챔피언 맨시니와 치열한 타격전 끝에 14회 KO패 한 후 4일 만인 11월 18일 오전 10시 55분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세계챔피언의 꿈을 쟁취하기 위해 이역만리 원정을 떠나 사투를 벌이다 싸늘하게 굳은 시신으로 돌아온 김득구, 그의 한 많은 복싱 스토리를 풀어본다. 

 

책을 파는 외판원에서 복서 입문

 

김득구는 1956년 8월 10일(호적 55년 1월 8일) 전북 군산시 옥구군 옥산면 당봉리에서 부친 이동석, 모친 양선녀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이름은 이덕구(李德九)였다.   

 

복싱에 입문할 때 라이센스엔 59년 8월 1일로 등재되었을 정도로 복잡다단한 그의 가족사만큼이나 그의 실제나이도 헛갈리고 복잡했다. 그의 천호상전 동기인 김응식(58년 강진)을 통해서야 그의 정확한 실재 나이를 알 수 있었다. 

 

▲ (사진 왼쪽부터) 천호상전 입학동기인 김응식 김득구 이상봉 (사진=조영섭 기자) 


김득구는 2살 때 부친이 타계하자 6살 때, 모친이 강원도 고성의 김호열 씨에게 재가하면서 이덕구 에서 김득구로 개명하면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이곳에서 3명의 의붓 형들과 더불어 생활하던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속초로 나가 과자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어나갈 정도로 빈궁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그가 첫 월급 8백 원을 손에 쥐자 제일먼저 달려간 곳은 서점이었다. 고입 검정고시를 위한 책이었다. 배고픔에 찌든 생활, 변화도 발전도 없는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74년 3월초 무작정 상경을 한다. 

 

7시간에 걸친 직행버스를 타고 도착한곳은 서울 마장동, 마침 그의 서울 입성을 축하해 주기라도 하듯이 그날은 보슬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첫날밤을 청계천 판자집에서 하늘을 이불삼아 보낸 그는 3일 만에 버스 안에서 책을 파는 외판원일을 시작한다. 이후 5년간 집안과 연락을 끊고 살면서 험한 세파를 맨몸으로 부딪치며 처절하게 살았다. 

 

그러던 75년 3월 14일, 다방에 책을 팔러갔던 그는 우연히 김현치와 빌라폴로의 WBA 주니어 라이트급 타이틀전을 TV로 본 후 발상의 전환을 한다. 당장 외판원을 그만둔 그는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찐빵장수, 철공소 등 20군데를 전전하다 구로공단 보세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부평초처럼 떠돌던 그는 책을 읽을수 있었고 물어물어 김현치씨가 당시 관장으로 있는 동아체육관을 찾아가 복싱에 입문을 한다. 그는 이때부터 비로소 안식을 찾았다. 

 

천호상전 복싱부에 입학 복싱 전성시대 열어

 

김득구의 복싱인생에 변곡점이 된 76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복싱에 입문한지 7개월이 흐른 77년 3월 서울 신인대회에 출전한 그가 라이트 웰터급에서 대뜸 4연승(2KO승)을 가두며 우승을 차지하자, 천호상전 복싱부에서 스카웃 교섭이 들어와 김응식, 이종근, 박종팔, 이상봉, 양일 등과 함께 동기생으로 입학한다. 

 

그해 11월 제1회 김명복배에 라이트급으로 출전한 김득구는 준결승에서 부산 동의공고 공대식에게 일방적으로 난타당한 끝에 3회 RSC로 패한데 이어 78년 세계선수권대회 선발전에도 예선탈락 하며 성장통을 겪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그해 제2회 김명복배 준결승에서 임수환(전북체고)과 장윤호(남산공전)을 차례로 누르고 신종관(전북체고)을 꺾으며 라이트 웰터급에서 우승한 동료복서 김응식과 함께 모교 천호상전의 복싱 전성시대를 열었다.  

 

프로데뷔 후 슬럼프에 자살기도, 전화위복의 계기 

 

그해 12월 김득구는 프로에 데뷔한다. 그해 신인왕전에서 이종실에 패해 탈락하고 김종표와 대결에선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슬럼프를 보이면서 정체현상을 보이던 어느날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 약속된 시간에 훈련캠프(세종호텔)에 돌아가지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이때 김현치 회장은 그를 냉담하게 외면해버린다. 

 

▲ 링위에 올라 전의를 불태우는 김득구 (사진=조영섭 기자)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는 약국을 돌며 수면제를 다량 구입한 후 여인숙에서 김현치 회장에게 유서를 남긴 후 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천운이었던지 극적으로 사흘 만에 영등포시립병원에서 회생을 한 그는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 그 후 담당 트레이너인 김윤구 관장과 훈련에 박차를 가한다.

 

김득구는 이후 눈부신 장족의 발전을 이룬다. 80년 7월 첫 원정경기에서 후아레스를 9회 KO로 누르며 워밍업을 마친 그는, 그해 12월 국가대표 출신의 이필구에 판정승을 거두며 한국 라이트급 정상에 오른다. 

 

그 후 난적 임홍규(25전  20승 14KO승 1무 4패)마저 4회 KO로 꺽으며 상승세를 탄 그는 국제전에서 3연승을 거두며 82년 2월 OPBF 라이트급 챔피언 김광민(20승 9KO승 1무 4패)의 타이틀에 도전을 위한 예열을 마친다. 이 대결에서 물이 오른 김득구는 9회 한차례 다운을 곁들이며 일방적으로 난타해 판정승을 거둔다. 오영호, 김태호, 김상현, 김광선 등 최정상급 복서들과 팽팽한 접전을 펼치던 세계타이틀전까지 경험한 국가대표 출신 김광민이 신예 김득구에 압도당하며 8점 전후의 큰 차이 판정으로 고개를 숙인 것이다.

 

춥고 배고팠던 한과 응어리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김득구

 

그 무렵, 그는 체육관 계단을 오르다 묘령(妙齡)의 여인과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첫눈에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두 눈에서 스파크가 일어난 김득구는 치밀한 구혼 작전으로 82년 6월 5일 약혼식을 올린다. 약혼식을 전후로 3차례의 동양타이틀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어느덧 12연승(7KO승)을 달리며  WBA 라이트급 세계 1위에 올라 지명전을 눈앞에 둔다. 

 

그해 10월 세종호텔에 캠프를 차린 김득구의 런닝 메이트는 천호상전 동기이자 전 동양 주니어 웰터급 챔피언 김응식 이었다. 김응식은 동료 김득구가 의협심이 강하고 근성이 넘친 복서라고 말하며 잠잘 때 맨시니를 생각하면서 이를 으드득 갈 정도로 강한 승부욕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 (왼쪽부터) 라스베가스 현지에서 김윤구 관장과 초쾌한 모습의 김득구 (사진=조영섭 기자)


이 경기에서 양 선수는 성난 황소처럼 머리를 맞댄 채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며 8천의 관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명승부를 펼친다. 적어도 9회까지 2명의 부심이 동점을, 1명의 부심이 1점차로 멘시니의 우세를 채점할 정도로 팽팽한 접전이었다. 하지만 10회에 석연찮은 파올로 균형이 깨졌고, 13회가 끝났을 때는 2명이 4점, 1명이 5점으로 채점할 정도로 경기는 기울고 있었다. 결국 기력을 소진한 김득구는 14회 19초에 터진 맨시니의 회심의 라이트에 모든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김득구가 링에 눕기 직전에도 로프를 붙들고 일어서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은 과거 춥고 배고팠던 한과 응어리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간절한 그의 의지가 무의식 중 표출된 행동 이었으리라. 

 

생전에 6백만 원이 적립된 통장과 봉천동 연립주택을 매입하기위해 불입한 3백만 원의 중도금 등 알토란같은 천만 원 정도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그가 삶을 등지자 대통령 하사금과 대전료 978만원, 각종 조의금 4천 4백만원 WBA사망보험금 10만불(7천5백만원) 등 정확히 1억 1천 747만 6200 원이 쏟아졌다. 

 

82년 프로야구 최고 연봉이 박철순(OB 베어스)의 당시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인 2천 400만 원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액수로 생각된다. 결국 이 돈은 약혼녀와 모친이 6:4로 나누기로 최종 합의를 하고 종결된다. 이후 모친은 ‘가난이 내 아들을 죽였다’며 72일 후인 83년 1월 29일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슴을 끊고 만다. 글을 깨치지 못한 김득구 모친의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김득구의 마지막 경기 주심을 본 리처드 그린도 7개월 뒤 죄책감에 시달린 끝에 자살을 하고 만다. 리처드 그린의 죽음과 비슷한 시기인 83년 6월 23일, 김득구의 유복자 김지완(金知完)군이 탄생했으니, 한편의 멜로드라마를 보는듯한 착찹한 심정이다.  그의 아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김득구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밖에 졸업할 수 없었기에 ‘완전히 알다’란 뜻으로 알지(知)에 완전할 완(完)이란 글로 아들의 이름을 미리 지어 놨었다.  

 

▲ 챔피언 맨시니와 도전자 김득구의 조인식 퍼포먼스 (사진=조영섭 기자) 


한편, 그의 트레이너였던 김윤구 관장은 “김득구의 모친은 논리 정연한 언변과 함께 여장부다운 기질이 있었다”고 회고하며 “김득구가 모친을 많이 닮은 듯 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실 김윤구 관장(55년 청도)은 동아체육관에서 많은 유망선수들을 발탁, 조련한 빛과 소금 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85년 12월, 유명우 챔피언 탄생에도 산파 역할을 담당했던 숨은 주역이었고 김득구 참사 때 가장 가슴아파한 사람이었다. 

 

김득구는 언젠가 “뼈대도 없고 재산도 없는 내가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눈앞의 넓은 바다와 그곳에 붉은 태양이 있었기에 용기를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를 보면 한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는 요소는 그가 처한 환경이나 여건이 아니라 어떠한 목표에 어떤 의미와 선택을 부여하면서 전력투구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높이 날지 못한 작은새, 불러도 대답 없는 그 이름 김득구. 그가 생전에 꿈을 키웠던 영롱한 동해바다와 붉은 태양을 바라보며 영면하시길 기원한다.

 

조영섭

문화저널21 복싱전문기자

 

현) 서울복싱연맹 부회장

현)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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