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⑥

[제2기] 대한제국의 전기통신 (1897~1910년) 덕률풍의 등장과 최초 전화개통

가 -가 +

이세훈
기사입력 2020-04-02

[제2기] 대한제국의 전기통신 (1897~1910년) 덕률풍의 등장과 최초 전화개통

 

전담조직 통신원 신설 

 

전신사업이 재개된 지 3년이 지난 1899년 서로, 남로, 북로의 전신선이 완전 소통됐다. 남포, 무안, 옥구, 창원 등에 내·외국의 선박이 상시 출입할 수 있는 개항지와 운산, 해주에 통신선로 본선에서 갈려 나가는 지선을 가설했다. 1900년 북로전신선은 원산-함흥까지 연장 개통하게 된다. 현업기관인 전보사는 청일전쟁 이전의 11개사에서 19개사로 늘어났다. 한편 우편사업도 크게 발전되어 38개소에 우체사가 설치되고 341개 부(府)·군(郡)에 임시우체사가 개설됨으로써 전국적인 우편업무를 보게 된다. 

 

1900년부터 국제기구 만국우편연합의 일원이 되어 외국 우편도 실시했다. 이러한 통신 업무의 확대로 중앙관리기관의 개편이 불가피했다. 우편, 전신, 선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기 위하여 농상공부 관할에서 독립하여 통신원이 신설됨으로써 기구를 강화하게 된다. 

 

1900년 9월 29일 통신원을 내각 으뜸벼슬 대신아문에 준하는 독립관아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전신업무와 우체업무를 통합 관리하던 우정총국의 폐지로 좌절되었던 체신관서가 독립하게 되어 그 지위는 향상되었다. 통신원의 위치는 농상공부 통신국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 자리는 조선시대 관청 육조의 하나인 옛 공조자리로 세종문화회관 부근이다. 과거 체신부와 정보통신부에서 지금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정부기관의 뿌리라 하겠다.  

 

최초의 전화기 등장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화기가 도입된 것은 1882년 3월경이다. 청나라에 영선사행의 학생으로 파견된 유학생인 상운이 청나라 천진 남국 전기창에서 기술 습득을 마치고 귀국할 때 가지고 온 것 가운데 전화기 2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 전종, 전선, 동선, 전상, 전표, 부전 등의 전화가설 용품도 있었다. 유학생 상운은 이들 전화기기를 배에 싣고 천진을 출발하여 인천에 왔을 것이므로 전화기의 도입 시기를 1882년 3월말 경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전화기가 들어 온 후 어떻게 사용되었느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유학생 상운이 가지고 온 전화기기는 얼마 후 발발한 1882년 7월 임오군란 때 문란한 군대에 의하여 파괴됐다. 영선사 김윤식이 재차 천진에 파견되었을 때 전화용품 및 구리동선 등을 북경으로부터 구입하여 1882년 10월 가지고 온 사실을 볼 때 군란으로 파손된 기기를 복구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천진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새로운 과학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것으로 전신·전화가 포함되어 조선 정부의 전화기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전화기는 ‘덕률풍(德律風)'으로 불렀다. Telephone의 중국어 소리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 전화기는 다리풍, 득진풍, 덕진풍, 전어기, 어화통, 전어통 등의 이름으로도 불렀다. 전화기의 첫 시험통화는 1892년 궁내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일본 동경에서 전화기를 구매하여 1893년 3월 1일 시험통화를 했다. 궁내에 전화를 가설할 단계에 이르러 동학군과 청일전쟁의 발발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궁내부 전화의 개통 

 

1902년 공중사용 전화개통에 앞서 먼저 개통되었던 것은 궁의 각 부를 약 10여대로 연결한 궁내부 전화였다. 1898년 1월 28일 궁내부에 전화시설이 마련되어 정부 각 관청과 멀리 인천해관을 직통으로 연결한 최초의 전화기가 설치된다. 궁내부 전화의 가설을 계기로 관할권의 문제가 제기됐다. 전화 운영권을 미국계의 한성전기회사에 왕명으로 부여하고 설치를 한국인 명의로 허가 했다. 궁내부 관제로 통신사를 두고 전화, 철도 등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그 밑에 전화, 철도의 2개 과를 두었다. 그 당시 궁내부 전화는 경운궁(덕수궁) 중심으로 가설했다. 

 

그러나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궁내부 전화의 개통 이전에 전화가 사용된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명성황후의 장례 때 가설 구간은 알 수 없으나 1897년 12월 5일 전화기 가설로 포상한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 우리나라에서 전화가 처음으로 사용된 시기는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의 인산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 당시 신문에 "대궐 안에서 각부로 전화기를 연결하는데 아이들이 종이 연을 날리다가 자꾸 연줄이 전화기 줄에 엉키어 전화가 고장 나므로 경무청에서 아이들이 연 날리기를 엄금 한다“고 했다. 

 

공중전화의 개통 

 

1900년 3월 통신원은 ‘전신, 전화 및 그 건설 보전에 관한 사항을 감독 한다’라고 통신원 관제가 제정됨에 따라 공중통신용 전화개설을 추진하게 된다. 1902년 3월 20일 한성-인천 간 첫 공중용 시외전화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개인전화 가입자도 80여명으로 늘었다. ‘전화규칙’ 공포와 ‘전화세칙’이 제정됨으로써 전화업무의 개시에 따른 법제의 완비를 보게 된다. 

 

▲ 광화문 세종로 공원(옛 광화문전화국)의 전기통신 발상지 기념탑 (문화저널21 DB) 


그리고 당시의 전화 사업에 있어서 시내전화 보다는 시외전화가 우선 목적이었다. 한성-인천 간 개시 후 개성, 평양, 수원 등지에 시외전화가 개통된다. 강원도에 탄광을 경영하던 독일 세창양행의 요구에 의해 1899년 11월 인천과 강원도 김화간의 전화도 개통했다. 

 

당시 봉건적 사회체제에서 전화를 설치할 만한 상류층은 근거리 심부름 정도는 하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기에, 먼 거리와의 소통이 가능한 시외전화를 선호했을 것이다. 

 

1902년 3월 공중용 전화 개통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전화를 사용할 기회가 주어지긴 했으나, 당시 관청 고용원의 하루 일당이 80전인 점을 감안할 때 5분간 50전의 통화요금은 일반 국민이 부담하기엔 턱없이 비싼 요금이다. 이렇듯 당시 일반 국민들에게 전화는 진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구경하기도 힘든 시기였다.

 

이세훈 

KT 시니어 컨설턴트

한국경제문화연구원 ICT 전문위원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댓글

i

댓글 수정 및 삭제는 PC버전에서만 가능합니다.

최신기사

URL 복사
x

PC버전 맨위로

Copyright ⓒ 문화저널2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