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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⑲

[제3기] 일제강점기(1910~1945년) 대한제국 체신관련 건축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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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훈
기사입력 2020-05-21

[제3기] 일제강점기(1910~1945년) 대한제국 체신관련 건축문화 

 

전화·우편 관련건물

 

일제 강점기 36년간 지어진 통신 건물의 대부분은 목조단층이다. 표현양식은 일본에 유행하였던 건물 형태였다. 다만, 중요도시의 건물에 한해서는 철근콘크리트조의 2층 정도의 건물 규모였다. 그 양식은 서구의 근대 건축형식이 차지했다. 

 

평양, 대구, 광화문, 용산, 인천, 서대문, 부산, 원산, 신의주전신전화국 등이 이 근대건축 양식에 따른 디자인이다. 당시에 인기를 일으킨 외래건축문화 양식이다. 1910년대에는 아직 한국인으로서는 정규건축가는 없었고 모두 일본기술자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남의 나라 영토에 머물러 사는 거류민에서 식민지 상인의 위치로 바뀐 일본 민간실업자들은 각지에 상공회의소 건물을 지었다. 또 은행건물도 규모를 갖추어 세워졌다. 이상 여러 시설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당시 근대 복흥식 또는 르네상스식 이라고 불리는 서구의 근대 건축물결이 들어왔다. 

 

우리나라 고유 문화를 물려받는 길이 끊길 뿐 아니라 전통이 사라지는 큰 시련을 받았다. 8.15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근대화의 과정에서 건축의 양식은 주체성 있게 성립하지 못했다. 이 시대의 주요 건물로는 조선은행(1912), 조선호텔(1914), 경성우편국(1915), 총독부박물관(1915)등이 있다. 

 

중앙감독부(광화문우체국 자리)

 

통신권 박탈을 위해 1905년 6월부터 한국통신기관인계사무를 보던 건물로 당시 근대적 입법기관 중추원청사(원래 철도원)로서 현 광화문우체국 자리다. 1905년 4월 통신권을 빼앗은 후 한반도를 병합한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통치행정을 담당하게 된다. 1912년 4월에는 조선총독부통신국을 체신국으로 개편하면서 총감부 통신관리국은 1910년 9월 30일 폐지됐다.

 

경성우편국(서울 중앙전화국 자리)

 

경성우편국 건물은 그 위치가 경기도 경성부 본정 1정목으로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서울 중앙전화국 부근이다. 청일전쟁시 청나라의 화전국을 일본이 점거하여 군용 통신소로 사용했다. 1902년 4월 군용 통신소가 폐지된 후 일본경성우편국 건물을 1913년 10월에 착공하여 1915년 9월에 준공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벽돌과 석조의 혼합구조로서 화려하고 거대한 것이다. 표현 양식은 사라센식이 가미된 영국 르네상스식으로서 주위의 조선은행과 대조되어 아름다운 건물의 하나였다. 접수창구는 23개소 연면적 1,320평이 되는 3층 건물이다.

 

광화문분국(통신발상지 기념물 자리)

 

1922년 전화가입자가 크게 늘어나 경성전화국의 교환기 설비가 한도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광화문통(세종문화회관)에 전화분국을 신축하고 공전식 교환기를 설치한다. 설치공사는 2개년 공사로 1923년 완공하여 같은 해 7월 개통을 보았다. 2층에는 우리나라 표준계량에 필요한 계량기기가 설치됐다. 모든 계량기기는 이곳에서 표준검정을 한다. 이 자리에는 광화문전화국이 건립되어 있다가 현재는 한국전기통신의 발상지 자리로서 기념 구형물을 설치했다.

 

우정총국(체신기념관)

 

우정총국은 의약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전의감으로 사용되던 건물로써 위치는 종로구 견지동 30번지(전동)이다. 1884년 4월 22일 한성의 우정총국과 인천우정분국의 업무가 개설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행정 우정업무가 시작된 곳이다. 

 

▲ 최초의 근대 행정업무가 시작된 체신건물인 우정총국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


그러나 같은 해 12월 4일 발생한 갑오정변으로 우정업무가 10여 년간이나 중단된다. 그 후 애국단체가 사용한 후 중동학교가 설립되면서 1915년 까지 학교 건물로 사용된다. 광복후 1956년 체신부에서 관리하여 오던 중 1970년 애국운동 장소로서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되어 사적 213호로 선정됐다. 

 

한성전보총국(통신발상지 기념물 자리)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내정이나 외교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전신시설을 서둘렀다. 청나라 전보총국 화전국으로 하여금 인천-한성-의주를 잇는 전신선을 시설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885년 8월 20일에 전신을 총괄하는 한성 전보총국이 개국한다. 8월 25일에는 한반도에서 최초의 전기전신이 바로 이 자리에서 발신됐다. 한성 전보총국의 자리는 서울 세종로 80번지, 세종문화회관 옆 옛 광화문전화국이 자리했던 뒤뜰 즈음에 열 칸 겹집의 우람한 기와집이다. 이 전기통신의 탄생지는 사역원의 관공서 건물이던 것을 간판만 바꾸어 달았다. 

 

사역원

사역원은 여러나라 언어의 통역과 번역 업무를 맡아보았다. 사역원에 시설된 전신은 전신옥편을 보고 한자를 숫자로 풀어 전신을 보냈다. 이를테면 인(仁)자는 0088, 천(天)자는 1557, 초(初)자는 0577로 송신을 한다. 수신처 에서는 해마옥편을 보고 한문 글씨를 풀어낸다. 전신이 확장되고 전화도 들여와 궁내부의 전화사업도 다시 개시된다. 1896년을 전후하여 궁중과 정부 관청간은 물론 인천에 이르는 전화시설도 갖추어  통신 한다 1899년 궁내부 전화는 덕수궁(경운궁)을 중심으로 가설됐다.

 

통신원

통신원건물은 사역원 건물로서 한성전보총국(화전국)이 사용했다가 1886년 12월 8일 청국공관 근처로 이동후 조선전보총국(남전국)이 들어섰다. 이어 농상공부 통신국, 한성전보사, 한성전화소, 한성우체사가 자리했다. 1900년 3월 16일 통신국은 폐지되고, 3월 23일 통신원 관제를 실시하여 체신, 통신, 선박, 선원등의 업무를 전담하도록 했다. 같은 해 9월 29일에 이르러 통신원을 농상공부 관할에서 분리하여 독립관서로 승격시켰다. 한국통신에서 전신·전화 발상지에 기념탑을 세워 이 터를 길이 보존하고 있다. 

 

한성전화소

전화소는 전보사에 부설되어 실질적으로 전보사가 겸하여 경영했다. 한성전보사와 인천전보사의 현업기관으로 전화소, 전화지소의 명칭으로 사용됐다. 1903년 전화소의 명칭으로는 한성·인천·개성·평양·마포·수원·도동·시흥·경교 등이다. 1902년 3월 30일에는 한성·인천간간의 시외전화업무가 개시됨으로써 우리나라 전화사업상 새로운 바탕을 이룩했다.

 

이세훈 

KT 시니어 컨설턴트

한국경제문화연구원 ICT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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