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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⑳

[제4기] 미군정통신(1945~1947년) 일제 항복 선언과 40여만의 통신권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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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훈
기사입력 2020-05-26

[제4기] 미군정통신(1945~1947년) 일제 항복 선언과 40여만의 통신권 회복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라디오를 통해 연합군에게 항복한다는 선언을 한다. 항복 선언은 14일 밤에 녹음되어 다음날인 15일 정오 일본 전역에 방송되었다. 이날 항복 선언은 정오부터 시작된 일본 동경방송(JOAK)을 조선 전역의 방송국까지 중계하였다. 

 

일왕의 떨리는 항복 선언과 이후 해설방송을 포함해 방송시간은 40여 분에 이르렀다. 항복 선언은 조선이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게 됨을 알리는 방송이었다. 제1방송에서는 5시 30분 뉴스 시간에 다시 한번 방송하고, 제2방송에서는 밤 9시 30분부터 녹음된 항복 선언 방송을 배경으로 뉴스를 몇 차례 방송하였다. 

 

연합군이 서울로 입성한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건물(중앙청)에서 항복조인식이 거행되고 미군의 군정이 선포된다. 주한미군사령부가 14일부터 ‘경성’을 ‘서울’로 바꾸어 쓰기 시작함에 따라 경성방송국 역시 서울중앙방송국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다. Korean Broadcasting System이라는 영어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이즈음이다. 

 

일본에 의하여 도발되었던 태평양전쟁(1941~1945)은 1943년에 접어들면서 패전의 양상을 보인다. 일본군부의 온갖 발악은 한국인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신음을 안겨 주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외국에 흩어져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은 침략자 일제로부터 조국을 광복시키려는 혼신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또는 광복군으로 대일전선에서 전투한 투사들이 있었다. 외교적 노력으로 조국광복에 공헌한 독립투사들의 활약은 큰 역할을 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뿐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미국·소련에 의하여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된다. 냉전체제로 국토분단의 현실은 시작되어 간다.

 

조국의 앞날과 운명을 알 수 없었던 국민들은 식민체제를 청산한 새로운 국가건설에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지역은 공산주의체제로, 미군이 주둔한 남한지역은 민주주의체제로 각기 달리하는 사회체제로 분리된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미국·소련 양국 간의 공동위원회가 여러 차례 개최하였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 한편, 연합국의 의도와는 달리 민족 주체적으로 통일기반 구축을 위한 노력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다. 

 

▲ 미군정청으로 사용되엇던 1945년 당시의 중앙청 전경 (사진제공=국가기록원)

 

남한에서의 정치정세는 극도로 혼란했다. 좌익·우익·중립의 노선과 이데올로기와 정치정책이 난무하고 이합집단이 거듭되면서 미군정은 그대로 시행된다. 자치 정부적 성격을 부여하는 입법의원과 민정장관제를 실시한다. 통치권은 미군사령관에 있었다. 독립이 확정된 한반도를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38도선 이남에서는 미군이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다스린 기간을 통틀어 미군정시대라 한다.

 

군정의 요원들은 대부분 식민지 시대의 지식층이었다. 이른바 통역을 사이에 두고 통치하는 통역정치 시기라 일컫는 이 기간의 행정은 식민지 지식층과 상층부가 주도하는 시기였다. 중국에서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과 망명지사들 대다수는 이들 세력을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삼아 신정부 수립에 임하게 한다. 행정·사법·교육·문화·언론은 물론 생산·유통·기술 분야에 있어서도 인력난을 이유로 식민지 체제의 기본제도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이행된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우리의 통신권은 회복된다. 1905년에 한일통신협정으로 잃었던 통신권이 40년 만에 회복된 것이다. 체신확보위원회의 활동과 함께 전기통신사업은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도 잠시뿐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된다. 

 

그동안 통신망은 서울을 중심으로한 전국단일 전기통신망에서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2개의 통신망으로 분리된다. 이는 통신 산업측면에서 한국전기통신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등장하게 된다. 광복이후 미군정의 감독 하에 일부 일본인 통신기술자를 계속 종사하게 한다. 한국인 기술자들로 대치운용을 시도했으나 현상 유지하기 어려웠다. 1946년에 들어서면서 혼란과 과도기적 상태는 개선되어 일본인 기술자들이 거의 물러났다.

 

1945년 8월 광복으로부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의 3년여 동안은 전기통신분야에서도 혼란과 시련을 겪는다. 광복과 함께 통신권이 회복되고 모처럼의 새 출발의 의지는 이후 한국전쟁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만다. 이후 계속되는 정치상황의 어두움과 사회적 정체에도 불구하고 전기통신은 회복되어간다. 

 

한편 미군정은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유엔에 제기한다.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를 통한 정부대립 안이 가결됐으나 소련의 거부로 유엔결의는 실현되지 못한다. 1948년 5월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이를 기반으로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세훈 

KT 시니어 컨설턴트

한국경제문화연구원 ICT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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