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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용의 인생과 예술…생명의 작가를 향한 격렬한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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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봉 상훈
기사입력 2020-07-13

소납(小納)은 몇 해 전 신심 충만한 박종용 화백으로부터 본 소납(小納)이 회주로 있는 산사음악회의 시원지인 지리산 불락사(佛樂寺) 불이폭포(不二瀑布) 우단에 위치해 있는 삼성각(三聖閣)에 박종용 화백이 필사(筆寫)·희사(喜捨)한 산신(山神), 독성(獨聖), 칠성(七星) 탱화(幀畵)를 모시게 되었다. 그의 탱화(幀畵)는 언제 보아도 뛰어난 필력의 영험함이 넘쳐흐르고 있다. 신묘한 그의 탱화(幀畵·佛畵)에 거듭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 탱화, 왼쪽부터 산신도(山神圖), 독성도(獨聖圖), 칠성도(七星圖) (사진=문화저널21 DB /자료사진)


그는 8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화업 60년에 이르고 있으며, 한시도 붓을 놓은 적이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0여 년 전부터 새로운 추상미술을 창작하기 시작해 국내는 물론 미국·프랑스 등 해외에서까지 호평을 받아 전시 소식 등이 들림에 따라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소납(小納)으로선 반갑기 그지없다. 그의 인생을 더듬어보면서 졸고(拙稿)로서 격려하고자 한다.

 

그는 화가를 꿈꾸던 고향시절에서 출발하여 인사동시절과 용인·천안시절을 거쳐 현재의 설악산 시절에 이르는 60수년의 만고풍상을 겪으면서 신비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아버님이 일찍 작고한 연유로 학업(대학)을 중단하면서 청년시절부터 어머님 및 6남매의 생계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생업수단은 자신의 작품을 팔아 돈을 마련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생활이 197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30년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지속됐다. 이 기간 수많은 각종 작품(회화·도자·조각 등)들을 제작하여 일본 등지에 판매하여 가족 및 형제자매들의 생계를 겨우 유지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가난과 고난이 엄습하는 질곡의 세월로 짐작되며, 쉽사리 상상하기 힘든 아픈 세월로 짐작된다.

 

언론에 드러난 그의 삶을 살펴보면, 1953년 12월 경남 함안에서 출생해 8살(1960)때 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2살(1964) 때 화투그림 등으로 ‘그림신동’이란 이야기를 듣는 바람에 화가를 결심했다. 이후 풍경(산수)·정물화 및 서부활극, 동·서양 영화배우 인물 그리기와 조각 등에 더욱 매진했다. 운명의 길로 자연스럽게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가히 천업의 작가라 할 수 있다.

 

대화가(大畵家)의 꿈을 안고 1969년(17세) 상경하여 인사동에 둥지를 튼 후, 학업을 병행하면서 만화, 극장간판, 화조도, 각종민화(책가도, 호렵도, 백동자도 등) 및 산수(풍경)·정물화와 인물(초상·누드)화는 물론 각종 불화(수월관음도, 산신도, 독성도, 변상도 등) 뿐만이 아니라, 각종 도예작품들과 조각(탈, 불상조각, 석 조각)까지 불철주야 창작(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제대(1977년) 후에는 학업을 중단하면서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눈물을 흘려가며 밤낮을 가로질러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발버둥친 노예의 생활과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고난과 시련이 도리어 박종용 예술의 자양분이 되면서 용광로 구실을 하기도 했다. 더하여 타고난 천부적 재능과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겠다는 의지까지 더해져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되어 운보 김기창 등 당대의 예술가들로부터 “최고의 필력이다”는 취지의 칭송을 수없이 듣기도 했다. 어쨌든 각종 민화, 호랑이, 불화, 조각 작품들이 일본에 판매되면서 그 어려웠던 시절(197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을 간신히 버티어 낼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의 세월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과정에서 모든 분야의 작품들을 다재다능하게 창작할 수 있는 ‘예술의 연금술사’ ‘전천후 작가’라는 명성이 자자해 질수록 도리어 생계유지 등을 위해 작품들을 창작했던 지난날들을 괴로워하면서,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를 탐구하는 생명예술에 대한 갈망은 깊어만 갔다. 운명의 필연적 흐름에 따라 추상회화 창작이 시작되었다(2004).

 

내설악백공미술관 건립은 새로운 예술세계 탄생을 알리는 전환점이 되었다(설악산시절. 2006〜현재).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늪 속에서 핀 꽃처럼 구상 및 재현 등에 있어 경지에 오른 박종용 화백은 그간 수많은 자신의 작품들이 언덕너머로 사라져 생명을 상실해 버린 상황에 서글픔을 느끼면서, ‘잠깐의 꿈속 세상에 예술가로서 순명을 다해야 한다.’라고 다짐한다. ‘설악산아틀리에’에서 영원을 갈구하는 ‘생명예술’의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무제 Untitle. 162.2×130.3(세로×가로). Mixed media on Canvas. 2018. ◇무제 Untitle. 130.3×97.0(세로×가로). Mixed media on Canvas. 2018. ◇무제 Untitle. 162.2×130.3(세로×가로). Mixed media on Canvas. 2018. ◇무제 Untitle. 162.2×130.3(세로×가로). Mixed media on Canvas. 2019. ◇무제 Untitle. 72.73×60.6(세로×가로). Mixed media on Canvas. 2019. ◇무제(자연과 문명) 300×150(세로×가로). 철판·돌. 2018. (사진=문화저널21DB / 자료사진)


생명예술’을 갈구하는 새로운 예술세계의 개척을 위해 ‘설악산아틀리에’에서 10여년에 걸쳐 구슬땀을 흘려가며 혹독한 시간들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고 이를 형상화하기 위해 뜨거운 예술의 용광로에 스스로를 던져 몸부림치면서 형상화한 오브제들이 살아 쉼 쉬기를 갈망하면서, 이를 위해 정말 처절한 수행과 노동을 감내했다. 

 

이런 과정에서 2015년부터 마침내 심도 깊은 신비의 추상 작품들이 탄생되기 시작했고, 다시 3년여 인고의 과정 속에서 많은 작품들이 탄생되어 2019년 1월 예술의 전당 및 3월 춘천KBS 전시장 등지에서 열풍을 일으켰다.

 

전시열풍은 박종용의 예술역사를 다시 쓰게 하면서 미국, 프랑스의 유수화랑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눈물의 월계관이라 할 것이다.

 

박종용 화백의 고백처럼 60수년 그의 인생과 예술은 말 그대로 땀과 눈물로 뒤범벅된 격렬한 드라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난의 작가에서 생명의 작가를 향한 격렬한 몸부림이다.

 

박종용 화백은 새로운 추상표현주의 작품에 대해 ‘결’로 명명하면서 오브제들 이 생명의 의미성을 가지면서 이 땅위에 살아 숨쉬기를 갈구했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돈을 벌기 위한 작품들을 하면서 수많은 세월동안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아파했다. 결의 완성을 위해 이제는 고민과 괴로움을 멈추고 싶다. 실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작품들을 했다. 아픈 세월 속에 마디마디 피멍이 들어있는 것 같다. 이젠 우주를 향해 비상하는 결들의 향연에 모든 것을 날리고 싶다. 결은 나의 분신이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면서 그간의 고통들과 새로운 예술에 대한 염원을 표출하기도 했다.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화엄(華嚴)의 예술세계 펼쳐 보이길  

 

60수년 풍상의 세월동안 일시도 붓을 놓은 적이 없는 박종용은 운명적 작가다. 생의 시련은 그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면서 인간의 풍모자체를 예술의 원형으로 주조시켜버린 희귀한 인간이자, 천성(天成)의 예술가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늘상 “영겁의 세월 속에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이승에서 살다간 흔적을 남겨야 한다”면서 예술에의 순교를 다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지 않을까만 대개의 경우 운명의 흐름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유실되어버리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어둠의 동굴 속에서도 광명의 새날을 믿어 의심치 않는 신념과 강인한 의지 등으로 끝내 추상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펼치고 있는 새로운 추상예술은 우주의 본원과 생명의 본질을 육필언어로 표출하려는 의지와 정열의 표현이다.

 

그는 자기 속에 무궁한 예술의 광맥이 솟아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운명과 사명 또한 예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의 눈은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으며, 그의 손은 힘찬 붓놀림에 흔들리고 있으며, 그의 몸은 칼날 위에 춤추는 곡예사처럼 화면 속에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처절한 예술의 노예를 자임하면서, 자신이 가야할 운명과 해야 할 사명을 향해 구슬땀을 흘리면서 자기수련을 가차 없이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 佛樂寺(불락사) 회주 상훈(尙勳)스님 (사진=문화저널21DB / 자료사진)

 

소납(小納)은 그의 삶을 일일이 알지 못하고, 미술을 평할 만큼의 전문적 식견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언론지상에 노출된 ‘박종용 화백의 인생과 예술을 향한 여정(12회 연작)’이란 인생 및 작품들을 나름대로 살펴본 결과, 지칠 줄 모르는 치열한 예술 혼을 불태워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개척한 점 등은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술가의 자세와 삶의 가치를 실천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다.

 

특히 그의 글에서 “산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나 목탁소리를 듣거나 사찰(절)의 오래된 목조건물들을 쳐다보면 절로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정화되는 것은 같아 수시로 사찰을 방문하여 오래된 목조건물을 만지면서 세월의 풍상을 느껴보기도 한다... 오늘도 불국정토를 지배하는 33관음 중 하나로 물에 비친 달을 내려다보는 수월관음의 여러 형상들을 생각하면서 심사를 달래기도 한다” 는 대목에서의 작가의 복잡한 심사를 위로해 주고 싶다.

 

여하튼 박종용 화백의 인생과 예술은 60수년 풍상을 통해 만화, 민화, 화조도, 인물(초상)화, 누드화, 정물화, 산수화, 영묘화(호랑이), 불화 등의 각종 평면예술을 넘어 조각(구상·목불·추상)은 물론, 더하여 도예 등 전 방위적으로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4년부터 10여년의 묵언수행을 통해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를 탐구하는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을 탄생시켜 열풍을 불러일으키면서 그의 예술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작가 박종용의 표현대로 돌이 닳아 가루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을 안고 모진 세월의 아픔을 감내하면서 달려온 것이다. 

 

그는 이제 다시 세계를 향해 비상을 나래를 펼치려 하고 있다. 그는 이미 생의 시련들을 통해 인간의 붕괴와 애환들을 골고루 맛보았고, 북망산천 피안세계의 문 앞으로 날아가 예술에의 순교를 다짐하면서 생을 불태우고 있는 중이다. 향후 그의 예술이 어떻게 펼쳐지며 세계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쉽사리 예단할 수 없겠으나, 세계인 박종용의 출현이 기대되는 상황이다. 

 

 “‘더는 해매지 말고 추상작품에 인생종지부를 찍어라’는 명령의 소리가 쟁쟁히 들려오고 있다. 고로 나는 오늘도 추상작품 ‘결’의 창작을 위해 작업실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작가노트가 더욱 주목되는 상황이다. 부디 정진하여  廣大無邊(광대무변)한 華嚴(화엄)의 예술세계를 펼쳐 보이길 기대한다.   

 

2020.  07. 13.    大韓佛敎曹溪宗 佛樂寺 會主 休峰 尙薰

 

佛樂寺(불락사)는 회주 상훈(尙勳)스님이 1986년 쌍계사 국사암에서 박범훈 중앙대교수, 석학 도올 김용옥 등과 함께 불교(산사)음악제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우리나라 불교음악의 성지이다. 회주 상훈(尙勳)스님은 불락사에서 통일신라 진감선사가 당나라에 유학 가서 배워 온 범패를 귀국하여 가르쳤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문(887)의 최치원 글씨를 가슴에  새기면서 범패를 통한 중생제도라는 범패(불교음악=국악)의 현대적 발전 등을 위해 남다른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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