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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용 화백의 인생과 예술_“신화창조를 향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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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기사입력 2020-07-19

먼저 저를 소개하겠다. 저는 서울에 있는 국민대학교에서 30년 이상 공공정책(public policies)을 가르치는 교수로 있었고, 지금도 명예교수로 있다. 2002년에서 2007년에 이르는 동안 대통령 정책실장(Chief of Staffs, Presidential Office of National Policies)과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Vice Prime Minister and Minster of Education), 그리고 대통령 정책특별보좌관(Special Senior Advisor for National Policies to the President)을 지냈다. 그리고 2018년 7월에서 2019년 3월까지 한국의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President of the Liberal Korea Party, Chairman of Emergent Supreme Governing Committee)을 지냈다. 

 

Ⅰ. 그의 인생과 예술은 땀과 눈물로 뒤범벅된 장엄하고도 격렬한 드라마

 

박종용화백을 알게 된 것은 2015년 가을,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던 중 당시 행정대학원에 다니던 그를 알게 되었다. 이후 대화과정에서 박 화백의 외가가 필자의 고향인 경북 고령인 것을 알게 되어 친교를 강화하면서, 인생의 속살과 격렬한 예술의 여정 및 작품세계 등을 살펴보면서 음미하곤 했다.

 

필자는 예술(미술)에의 관심이 지대하여 시간이 날 때마다 (미술)전시장을 찾아다니면서 작품 감상과 작가와의 대화를 즐기곤 한다. 특히 2019년에는 박종용 화백의 예술의 전당 및 춘천KBS, 인사동 전시회 등에 모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 그의 추상표현주의 새로운 작품들이 열풍을 일으켜 외국에서까지 관심을 끌고 있다는 근간의 보도 등을 접하고, 신화창조의 열정으로 구슬땀을 흘리면서 세계로 비상하려는 그의 인생과 예술을 짧은 문면으로 스케치해 본다.

 

다행스럽게 필자는 수시 대화를 통해 박종용 화백의 눈물서린 인생역정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의 인생과 예술은 ‘땀과 눈물로 뒤범벅된 격렬한 드라마’ 자체이며, 일생을 통해 風餐露宿의 보헤미안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운명적 예술가다.

 

▲ (왼쪽부터) ◆풍속도(김홍도 원작 재현) ◇치수 : 35×40cm(가로×세로) ◇재료 : 장지에 채색(먹·동양물감) ◇제작년도 : 1970년 ◆풍속도(김홍도 원작 재현) ◇치수 : 32×38cm(가로×세로) ◇재료 : 장지에 채색(먹·동양물감) ◇제작년도 : 1970년 (사진=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박종용 화백은 1953년 12월 30가구 밖에 되지 않는 한적한 산촌마을인 경남 함안군 여향면 내곡리 봉곡 부락에서 당시 교사이던 아버지(박기봉)과 가사 일에 종사하던 어머니(전욱남)의 2남 4녀 중 2남으로 출생했다. 

 

당시의 시골풍경이 그러하듯 형 및 마을 친구들과 동네 야산에서 뛰어놀거나 고기잡이, 매미잡기 등으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8살(1960년)이 되어 집에서 4km정도나 떨어진 여항면 소재지의 외암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책 보따리를 매고 고무신을 신고 걸어서 다녔다. 1960년대 시골마을의 전형적인 풍속도다.

 

운명의 예시할까? 초등(국민)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는 어느 날 서예가이자 화가인 부산 송도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가 주말 고향(함안)으로 돌아와 초가집 사랑채에서 그림을 그릴 때 옆에서 만화 속의 그림을 그려보기 시작한 것이 예술인생의 출발이었다. 벌써 60년 전의 일이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서예와 그림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고, 두 살 위인 형(종헌) 역시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가문의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8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박종용은 이때부터 초롱불을 밝혀놓고 인물, 풍경 등의 각종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또한 4km정도나 떨어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간 중간 쉬면서 책 보따리 속의 노트 등을 꺼내 마을풍경 및 농부들의 모습 등을 수시로 스케치하곤 했다.

 

▲ (왼쪽부터) ◆산수 ◇재료 : 순지에 채색(동양화물감) ◇크기 : 65×43.8cm (가로×세로) ◇제작년도 : 1979년 ◆산수 ◇재료 : 순지에 채색(동양화물감) ◇크기 : 65×43.8cm(가로×세로) ◇제작년도 : 1979년 (사진=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당시(1960년대)는 구슬치기, 딱지치기, 설매치기 등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이 통상적인 모습이었으나, 박종용은 이런 일상적인 유희생활보다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또한 틈틈이 낫이나 부엌칼, 연필칼 등으로 각종 (인형)조각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어린 시절은 그림그리기 및 조각 등으로 일관했다. 

 

특히, 12살 때 화투 그림 등을 그려 보여주자,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림신동’이란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림신동’이란 칭찬에 고무된 박종용 이때부터 솔거 등과 같은 역사에 남을 화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마치 신들인 사람처럼 초롱불을 밝혀가며 그림을 그리거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목마다 쉬어가면서 쉼 없이 수많은 각종 그림들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과정 등에서 운명은 저절로 결정된 것이다. 가히, 천업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이렇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화가의 꿈을 알고 각종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 박종용은 초등학교 졸업 후, 마산으로 유학하여 하숙생활(마산 창신중학교)을 시작했다. 박종용의 중학생 시절은 그림 그리기에 더하여 복싱, 마라톤 등, 운동에 몰두한 시기였다. 그러나 관심사는 미술이었고, 그림 그리기에 본격 몰두했다.

 

이 시절(중학시절)에는 하숙집 방안에서 연필, 잉크펜 등으로 영화배우들의 인물(초상)을 그리거나, 토·일요일에는 수시로 스케치 북을 들고 마산 앞 바닷가에서 바다 풍광을 스케치 하거나, 마산 무악산으로 올라가서 무악산의 풍광(산수)이나, 들녘의 야생화 및 화원의 꽃들을 스케치 한 후, 작품으로 완성하기도 했다. 

 

또한 이시기에 진주 개천예술제, 경주 신라문화제 및 기타 크고 작은 (학생)사생대회에 참전하여 수없이 입·특선 했고, 자신의 그림들이 학교(창신중학교)에 늘 쌍 걸려 있었다. 미래의 大畵家(대화가) 꿈을 더욱 다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중학교에 입학 후 운동, 미술 등을 더욱 심취해가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운동선수나 그림쟁이는 굶어죽는다”는 식으로 수차 우려를 표명했으나, 아들(박종용)의 뜻을 꺾지 못해 체념상태에 빠진다. 박종용의 중학생활은 운동 및 그림그리기로 일관했으나, 그의 꿈은 오로지 大畵家가 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렇듯 박종용의 중학시절은 복싱, 마라톤 등 운동과 그림그리기 등에 혼신의 노력을 다한 치열한 시기였다. 특히, 1968년 창신고등학교(마산)에 입학 후 그해 여름 부산에서 열린 한·일 친선마라톤 대회(중등부)에 출전하여 1등을 했다. 이 마라톤 대회는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다음해(1969년) 제11회 베를린 세계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을 배출한 양정고등학교에서 체육특기생으로 박종용을 스카우트하는 동인이 되었다. 또한 1969년 상경과 동시에 고려민예사 화가로 취업하여 본격적으로 인사동 시대를 펼칠 수 있도록 한 배경이 됐다.

 

비록 (운동)특기생으로 스카우트 되어온 상황이었지만, 1969년 여름 상경한 후,  당시 선망의 대상인 고려 민예사 화가로 발탁되어 인사동에서 화실을 마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체육특기생으로의 운동 및 (보충)수업 등 학업 유지에 필요불가결한 시간 외에는,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만 집중했다. 오전 학교수업을 마치자마자 인사동 화실로 달려가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박종용의 인사동 시절은 이렇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大畵家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예술의 용광로 속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이때가 불과 17살 때 인 1969년 여름이다.

 

어쨌든 그의 인사동 시절(1969〜 )은 이렇게 시작됐다. 어찌 보면 운명의 계시에 따른 처절한 예술가의 길로 저절로 접어든 것이다. 이 시기에 조계사의 단청을 보고 불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삼각지에서 미군 초상화를 그렸으며, 충무로 등지에서 만화와 극장 간판 등을 그렸다. 또한 시간이 날 때 마다 청계천 만물시장을 찾아다니면서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는 각종 그림과 골동품들을 관찰하면서 모든 분야의 그림들을 그려내는 등, 스스로를 혹독하게 단련시켜 나갔다.

 

이렇듯 박종용의 예술(미술)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를 가혹하게 단련시키면서 형성되고 진화되어 간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런 과정에 박종용의 예술세계는 나날이 숙련되어갔고, 필명도 나름대로 알려지게 되어 운보(雲甫) 김기창  화백 등 당대의 거장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고교 졸업 수년 후 한양대에 입학했으나 그해 가을(1974년) 입대하였고, 1년 후 교사였던 아버님이 갑자기 타계하여 제대 후(1977년)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의 생계유지 등을 책임져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학업을 포기하면서 상업화가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에 한이 맺힐만한 상황이었다.

 

▲ (시계방향) ◆도자기(접시) ◇재료 : 고령토·백토 ◇크기 : 15×15×7cm(가로×세로×폭) ◇제작년도 : 1980년대 초반 ◆도자기(항아리) ◇재료 : 고령토·백토 ◇크기 : 41×49×41cm(가로×세로×폭) ◇제작년도 : 1980년대 초반 ◆불교조각 ◇재료 : 괴목 ◇크기 30×48×5cm(가로×세로×폭) ◇제작년도 : 1990년대 초반 ◆수월관음도 ◇재료 : 실크천에 금분채색(석채) ◇크기 : 65×122 (가로×세로) ◇제작년도 : 2020(한국) (사진=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이런 아픔을 가슴에 묻고 제대(1977. 8)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인사동 및 용인·천안아틀리에를 전전하면서 눈물을 흘려가며 손발이 벗겨지도록 초상화, 산수화, 화조도, 정물화, 영묘화, 각종 민화(책가도·백동자도·까치호랑이 등)와 산신도·독성도·변상도·수월관음도 등 각종 불화들과 호랑이 그림들을 밤낮을 가로질러 쉼 없이 그렸다. 특히 용인(1979〜1990) 및 천안(1990〜2006)시절에는 평면예술을 넘어 도자·조각·판화·타일그림 등, 전 장르로 확산시키면서 살기위해 발버둥 쳤다. 다행히 일본과의 거래 등으로 어렵게나마 생계를 꾸려갔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땀과 눈물로 뒤범벅된 격렬한 인생드라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Ⅱ. 세계가 손짓하는 박종용 예술. 향후 어떤 위업을 행할지 기대되는 상황

 

살펴본 바와 같이 박종용 화백의 삶과 인생(예술) 역사는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눈물서린 질곡의 삶이었다. 특히, 용인(1979〜1990)·천안(1990〜2006)시절에는 가족 및 형제자매들을 살리기 위해 평면예술을 넘어 도자·조각·판화·타일그림 등, 전 장르로 확산시켰고, 완숙미가 더해짐에 따라 ‘예술의 연금술사’ 전천후예술가‘로 別稱(별칭)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어려웠던 시절 창작했던 수많은 작품들이 역사의 저편으로 함몰되어 流失(유실) 되어버린 상황에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 땅위에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생명예술을 갈구했다. 운명의 필연적 흐름이자 계시였다.

 

▲ (시계방향) ◆무제(결) ◇재료 : 마대·흙·석채 ◇크기 : 112×145(가로×세로) ◇제작년도 : 2016년 ◆무제(결) ◇재료 : 비닐천에 흙·석채 ◇크기 : 91×116(가로×세로) ◇제작년도 : 2016년 ◆무제(결) ◇재료 : 마대·흙·석채·단청 ◇크기 : 73×91(가로×세로) ◇제작년도 : 2019년 ◆무제(결) ◇재료 : 마대·흙·석채·단청 ◇크기 : 73×91(가로×세로) ◇제작년도 : 2019년 (사진=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수많은 명상 끝에 2004년 겨울부터 천안아틀리에에서 우주의 신비를 육필언어에 담아내는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2004〜2005) 충격적인 실패를 맛보았다. 모든 장르의 작품들을 다재다능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상황에서 형편없는 졸작으로 보여 지는 작품들 앞에 망연자실하면서, 2006년부터 ‘설악산아틀리에’에서 구슬땀을 흘려가며 노동의 역사를 시작했다. 

 

새로운 생명예술(추상표현주의)을 향해 다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경계를 넘어가는 생명예술을 향한 또 다른 질풍노도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2015년 겨울경에야 비로소 심도 있는 작품들이 탄생되기 시작했다. 다시 3년여의 세월을 거쳐 마침내 고독과 신비 및 운율과 시상을 머금은 수많은 생명(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이 탄생됐다. 작가는 이 과정을 “곰이 인간이 되기 위해 동굴에서 몸부림 친 것과 같은 혹독한 시기였다”고 술회하곤 했다.

 

▲ ‘결의 교향곡’ 개막식 (2019. 1. 예술의 전당) (사진=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이렇게 탄생되어진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은 작년 1월 예술의 전당 및 3월 춘천KBS 전시회 등지에서 속살을 드러내면서 열풍을 일으켰다. 필자는 이들 전시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 특히 예술의 전당 전시에서 고학찬 (예술의 전당)사장은 예술의 전당 개관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하였다면서 감격해 했다.

 

뜨거운 전시열풍은 관객의 시대를 개막하면서 그의 예술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예술의 용광로에 인간사의 상흔을 녹이면서 신화창조를 향한 새로운 여정의 시작으로 보여 진다. 세계를 향한 비상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아닐 수 없다.

  

8살 때부터 작품 활동(스케치)을 시작한 박종용은 오늘에 이르는 60년 세월동안 일시도 붓을 놓은 적이 없는 天成의 작가다. 특히, 청년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런 타계로 가족 및 형제자매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또한 그 어려웠던 시절(197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 정말 노예처럼 작업하여 어쩌다 팔려나가는 작품 값 등으로 버티어 나가면서도, 예술에의 순교를 다짐하면서 쉼 없는 자기수련 감행하였고, 마침내 고독과 신비 및 운율과 시상을 머금은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의 독백처럼 “돌이 닳아 가루가 되었으며...”하는 간절함을 안고 모진 세월의 아픔을 감내하면서 달려온 것이다. 그의 일생은 생명예술을 향해 몸부림친 질풍노도의 역사다. 불굴의 의지로 생의 모든 시련들을 이겨내면서, 마침내 추상표현주의의 새로운 예술을 일구어낸 廣大無邊한 작가라 아니할 수 없다.

 

▲ 박종용 화백 전시회 개막식에서 축사하는 김병준 명예교수 (2019. 3. KBS 춘천벙송총국) (사진=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이렇게 탄생된 새로운 추상회화는 크나큰 반향을 일으켰고, 나아가 미국 유수화랑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일본 등지까지 관심을 기우리면서 초청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60년 성상의 풍상 속에 불굴의 의지로 끝끝내 위업(추상표현주의)을 달성한 박종용 예술에 세계예술계가 손짓을 보낸 것이다. 세계를 향한 박종용 예술의 불빛의 비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그가 어떤 위업을 행할지 기대되어지는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필자는 박종용 화백과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2020.   07.  17.  

국민대 명예교수  김병준 

 

김병준 박사(정치학)는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원장, 전국 사립대학교수협의회 공동회장(Co-chairman), 대통령 정책실장,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부총리), 경제신문 이-투데이(E-Today) 회장,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명예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예술(미술)분야에 관심이 지대하여 공직에 있는 동안 청와대를 비롯한 공공기관들의 예술품 구입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때때로 언론에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평론 등을 기고하는 등, 예술(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예술, 특히 미술 분야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고위공직자 출신 인사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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