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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용 화실] 신화창조의 화살 갈고 있는‘설악산아틀리에’(1)

운명 전환의 순간들 속에 경계를 넘어가는 원로한 선원의 미를 향한 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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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국 기자
기사입력 2020-07-20


운명 전환의 순간들 속에 경계를 넘어가는 원로한 선원의 미를 향한 투혼 


 

강원도 인제군 북면 황태길 45 소재 내설악백공미술관 내 박종용 화백의 ‘花雲堂’ 아틀리에를 다녀왔다. 그의 화실은 미술관 부지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난 3월 건축된 하얀 목조건물로서, 작업장 및 작품 및 각종 재료 보관용으로 사용하는 방 등, 3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방 구석구석 마다 그리다만 각종 작품들이 널려있어 약간 삭막하고 산란했다. 2006년부터 팬션아틀리에에서 작업하다 지난봄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외부와 담을 쌓고 있다면서 근황을 설명했다.

 

▲ 박종용의 아틀리에 '화운당(花雲堂) 내부  © 박영주 기자


그의 고향시절 및 인사동·용인·천안시절의 활동 등, 박종용 예술이 걸어가는 길을 알고 있는 기자는 ‘이곳이 세계화를 향한 명작창작의 마지막 공방이 될 수도 있다’란 생각이 미치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서렸다. 또한 향후 이 고절(孤絶)한 방안에서 탄생될 명상과 신비의 작품들에 대한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기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박종용 화백의 생애와 변모하는 작품세계 등을 심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삶은 한편의 격렬한 드라마였고, 고난의 천재작가에서 생명예술을 향해 구슬땀을 흘려가며 원로한 선원의 미를 향하여 경계를 넘어가는 운명전환을 위한 고군분투의 순간들이었다. 참으로 희귀한 천상의 예술인이다.

 

그는 대화가(大畵家)를 꿈꾸던 고향 시절(함안·마산시절. 1953〜1969)에서 출발하여 본격 활동을 시작한 인사동 시절(1969〜1979)과, 고난과 확장의 용인·천안시절(1979〜2006)을 거치면서 쌓인 내공 등으로 모든 예술분야를 능수능란하게 창작해 낼 수 있는 전천후 예술가로 변모했다. 그러나 운명의 필연적 흐름에 따라 생명의 본원과 우주의 신비를 표현하는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시작했으나, 초기(2004〜2005년) 실패를 맛보면서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설악의 아틀리에서 모진 수행을 다한 결과(2006〜 ),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2015년 겨울에야 심도 있는 작품들이 탄생되기 시작했다. 다시 1000여일의 사투 끝에 생명의 율동과 신비를 머금은 작품들이 탄생되어 작년 1월 예술의 전당 및 3월 춘천KBS 전시 등지에서 열풍을 일으켰다. 전시열풍은 박종용의 예술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면서, 세계를 향한 신화창조의 화살을 당기게 하고 있다.

 

▲ 박종용화백의 아틀리에 화운당(花雲堂) 전경  © 박영주 기자


솔직히 박종용의 삶과 인생(예술) 역사는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눈물서린 질곡의 삶이었다. 가난과 고난의 천재작가에서 생명예술을 향해 몸부림친 질풍노도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이러한 60수년 성상 풍상의 과정에서 지칠 줄 모르는 자기수련의 결과로 인간자체를 예술의 원형으로 변모시키면서, 마침내 영원한 생명예술을 갈구하는 신묘한 추상표현주의의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하면서 세계를 향해 비상을 나래를 펼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8살 때부터 스케치를 시작했고, 12살 때 화투그림 등으로 ‘그림신동’이란 이야기를 듣는 바람에 화가가 되기를 결심했다. 이후 17세에 상경하여 인사동에 화실을 마련하면서 운명적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화가의 길은 초기 만화 및 극장 간판 그리는 일로부터 시작됐고, 인사동, 청계천 등지에서 각종 화집 등을 구해 밤낮없이 각종 그림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박종용 예술의 뿌리는 이렇게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쨌든 초기의 만화작업 및 극장 간판 제작 등은 예술가 박종용 탄생의 용광로 구실을 했다. 

 

또한 김홍도, 신윤복 등 조선시대 대가들의 신선·풍속·인물화 등, 각종 재현그림을 통해 내공(필력)을 더욱 강화시켰고, 화조도 창작 등을 통해 독창적인 자기예술을 꽃피웠다. 이런 과정에서 ‘뛰어나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운보 김기창 등 대가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 박종용의 아틀리에 '화운당(花雲堂) 내부  © 박영주 기자


그의 작품 활동은 군 복무 기간(1974〜1977)에도 지속됐다. 그러나 입대 1년 후 아버지의 갑작스런 타계로 제대 후,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의 생활비를 책임져야했다. 부득이 학업을 중단하면서 그림을 팔아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상업화가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고난의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부터 가난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인사동·용인·천안아틀리에를 전전하면서, 눈물을 흘려가며 손발이 벗겨지도록 초상화, 산수화, 화조도, 정물화, 영묘화, 각종 민화, 불화 및 호랑이 그림들을 밤낮을 가로질러 쉼 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생계유지 등을 위해 도자 및 조각(탈, 민예, 불상, 석조각 등) 등과 타일그림 등, 모든 분야의 작품들을 쉼 없이 제작해 나가는 광폭행보를 지속했다. 다행스럽게 작품실력을 평가받아 민화, 호랑이, 탈·불상 등의 각종 작품들이 일본 등지에 약간씩 팔려나가 어렵게나마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고난의 시기에 이 땅의 예술가들이 겪은 눈물서린 삶의 전형이다.

 

60수년의 풍상은 그를 모든 분야의 예술(미술)작품들을 능수능란하게 표현하고 조형하는 예술의 연금술사로 변모시켰다. 초상(인물)화는 경지에 이르렀고, 당시(1970년대)로서는 역동적인 누드화를 창작하여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전통 민화에서 탈피한 독창적 민화 예술세계를 구축하여 민화예술의 지평을 확장시켰고, 전통 불화(佛畵)의 특장 위에 독창성을 가미한 불화 예술세계를 구축하여 세계유수화랑 관계자들로부터 ‘극동의 보석’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 박종용의 아틀리에 '화운당(花雲堂) 내부에 걸려있는 대형 호랑이그립     ©박영주 기자

 

또한 트레이드마크로 인식되고 있는 호랑이 그림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그의 예술적 경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물)호랑이의 웅혼과 기상과 세밀한 묘사력 등은 가히 세계최고의 기량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박종용의 그림은 8살 때부터 영화배우 등의 인물 및 고향산천의 산수(풍광)로부터 시작됐고, 중학시절(1965〜 )부터 인물·산수·정물화 등을 본격 그리기 시작했다. 박종용의 산수화는 선명하고도 강한 느낌을 주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선(線)예술로서, 상상과 실경이 어우러지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같은 청아함과 고졸한 품격이 물씬 풍겨 나오는 독보적 작품들이다. 

 

또한 정물화와 지난해 드라마 제작을 위해 KBS춘천방송총국의 요청에 따라 섬광처럼 그린 파스텔화 등을 통해 광대무변한 그의 예술적 경지가 다시금 확인되기도 했다.

 

박종용 예술은 초기 평면으로 시작되었으나 1979년 용인시절을 시작하면서 도자 및 조각, (목)판화 등으로 다변화된다. 어머니 및 가족, 형제자매들의 생계유지 등을 위해 영역을 확대한 것이었다. 사실 조각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낫이나 부엌칼 및 연필칼 등으로 팽이나 눈썰매머리 용 조각 및 각종 인형(조각)작품 등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1980년 각종 도자(작품·생활도예) 제작을 시작하면서,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을 드나들면서 수없는 각종 탈을 스케치한 후 나름의 생각을 가미하여 탈을 조각(제작)했고, 봉황, 원앙 등 민예조각과 각종 불상·불화 및 석(石)조각과 목판화 작업까지 했다. 더하여 1990년대에는 인어공주 등, 목욕탕 타일그림까지 그리면서 정말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한시도 좌절하지 않았고, 도리어 생동하는 의지력 등으로 세계를 향한 비상을 꿈꾸면서, 구슬땀을 흘려가며 몸부림치고 있다. 더하여 운명과 사명에 대해 “더는 헤매지 말고 추상작품에 인생종지부를 찍어라”라는 명령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면서, 신화창조의 화살(작품)을 가다듬고 있다.

 


고독한 작업실에서 몸부림…세계로 비상하는 박종용 예술 기대


 

60수년 그의 인생과 예술은 말 그대로 땀과 눈물로 뒤범벅된 격렬한 드라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 박종용 화백은 “고난의 세월 동안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눈물을 흘려가며 밤낮을 가로질러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했다. 살기 위해 발버둥친 노예생활과 다름없었다”고 술회하면서, “이런 고난 등이 도리어 자양분이 되어 새로운 예술탄생의 용광로 구실을 했다”면서 그 어려웠던 시절들을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작가의 고백처럼 “돌이 닳아 가루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을 안고 모진 세월의 아픔을 감내하면서 달려와 마침내 추상표현주의의 새로운 예술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 작업중인 박종영 화백  © 박영주 기자


만고풍상 생의 시련들을 통해 인간의 붕괴와 세상사 애환들을 골고루 맛 본 그는 세계로 비상하는 꿈을 꾸면서, 예술에의 순교를 다짐하면서 처절한 예술의 노예로서 흙으로 돌아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치열하게 예술 혼을 불태울 것을 다짐하면서, 다시 구슬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속에 무궁한 예술의 광맥이 지속적으로 솟아나고 있음을 예지하고 자각하면서 결연(決然)한 자기선언을 했다. 생명의 작가를 향한 격렬한 몸부림인 것이다.

 

작업실의 박종용 화백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종횡 무진했다. 그의 눈은 독수리와 같이 매섭게 화면을 응시하면서 불타올랐고, 그의 손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점 한 점씩 찍어나갔다. 호흡을 정지했다 다시 숨을 내뿜으면서 계속되는 작업 속에서 그의 몸은 땀방울로 흥건히 젖어갔다. 정말 중노동이었다.

 

이런 상황이 안타까워 쉬어가며 할 순 없는지 묻자,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것이 생의 운명이라면…이 땅에 무엇을 남겨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붓을 놓을 수는 없다”면서 씩 웃어보였다. 작품마다 만점 이상의 점들을 호흡을 정지하면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한 점 한 점 찍어내는 과정은 정말 소름 돋을 정도로 치열했고, 작가의 고충이 진하게 가슴속으로 전달됐다.

 

가족 곁으로 가지도 못하고 절해고도와도 같은 백색의 ‘설악산아틀리에’에서 구슬땀을 흘려가며 치열한 예술 혼을 불태우는 박종용 화백은 보헤미안을 넘어 설악도인(雪嶽道人)을 연상시키는 기인의 모습이었다. 세상사를 멀리하며 신화창조의 열망을 가슴에 안고 고독한 작업실에서 땅방울을 흘려가며 오늘도 붓질을 계속하고 있다. 향후 그가 어떤 위업을 행할지, 세계인이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되는 상황이다. 세계로 비상하는 박종용 예술이 기대된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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