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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용 화실] 신화창조의 화살 갈고 있는‘설악산아틀리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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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국 기자
기사입력 2020-07-20


깊어가는 아틀리에의 밤…그의 붓놀림은 점점 격렬해지고


 

‘설악산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박종용 화백의 모습은 무한을 향해 구슬땀을 흘리는 구도자의 수행 그 자체다. 이러한 묵언수행은 2006년 여름 ‘설악산아틀리에’로 옮긴이래 현재까지 묵묵히 계속되고 있다. 특히, 만고풍상 60년 고난의 작가생활을 거쳐 70세를 바라보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세계로 비상하는 꿈을 꾸면서, 자신의 운명과 사명을 확실히 자각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치열하게 예술 혼을 불태울 것을 다짐, 생의 종점까지 결의 창작에 매진할 것을 결연히 선언하면서, 다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 작업중인 박종용 화백  © 박영주 기자


세계화의 꿈을 꾸게 한 2019년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간들이었다. 10여년 인고의 과정 속에서 탄생한 추상표현주의 작품(결)들이 2019년 1월 예술의 전당 및 같은 해 3월 춘천KBS 전시장 등지에서 뜨거운 열풍을 일으킴으로서 박종용의 예술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더하여 지난해 연말 세계적 권위의 미국 유수화랑의 초청을 받아 금년 2월 하순 미국을 방문했고, 이 방문에서 미국과의 전시협의와 주요 예술계 인사들과 교분 및 프랑스 초청까지 받게 된다. 

 

10여년 구술 땀을 흘려 창작된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를 탐구하는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에 매료되어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세계가 손짓한 것이다. 무궁한 예술의 광맥이 숨겨져 있는 그를 세계인들이 먼저 알아본 것이다. 60년 성상의 풍상 속에 탄생된 박종용의 새로운 예술(추상표현주의)에 세계예술계가 손짓을 보낸 것으로, 세계를 향한 박종용 예술의 희미한 불빛의 비추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변화된 상황에 고무되어 세계로 비상하는 꿈을 꾸면서 지난 3월 16일자 작성된 그의 작가노트 일단을 살펴보면,

 

“...돈을 벌기 위한 작품들을 하면서 수많은 세월동안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아파했다. 결의 완성을 위해 이제는 고민과 괴로움을 멈추고 싶다. 실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작품들을 했다. 아픈 세월 속에 마디마디 피멍이 들어있는 것 같다. 이젠 우주를 향해 비상하는 결들의 향연에 모든 것을 날리고 싶다. 결은 나의 분신이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추상미술 창조를 위해 10여년 이상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돌이 닳아 가루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을 안고 모진 세월의 아픔을 감내하면서 여러 점의 추상미술을 창작했다... 나이 70을 바라보는 이제야 어렴풋이 길이 보이는 것 같다. ‘더는 해매지 말고 추상작품에 인생종지부를 찍어라’는 명령의 소리가 쟁쟁히 들려오고 있다. 고로 나는 오늘도 추상작품(결)의 창작을 위해 작업실로 향할 수밖에 없다...“ 결연한 자기선언서인 것이다.

 

▲ 박종용 화백의 아틀리에 화운당(花雲堂) 내부 모습  © 박영주 기자


8살 때부터 작품 활동을 한 박종용은 오늘에 이르는 60년 세월동안 일시도 붓을 놓은 적이 없는 운명적 예술인이다. 60년 화업생활 동안 실의와 좌절이 그를 수없이 유혹하였지만, 자신의 운명과 가야할 길을 알고 있었기에 자기수련을 통해 고독과 시련을 극복하면서 몸속에 내재해 있는 재능을 표출하여 마침내 추상표현주의의 화업을 달성했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끝내 추상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가는 그의 삶은 땀과 눈물로 뒤범벅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격렬한 드라마라 아니할 수 없다. 정말 천성의 예술가인 것이다.

 

이렇게 탄생된 추상회화는 크나큰 반향을 일으켰고, 미국, 프랑스, 일본까지 관심을 기우리면서 초청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박종용 화백은 17〜18세에 이미 묘사력과 필력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천부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불화(佛畵)제작 등에 세계유수화랑 관계자들이 “극동의 보석”이라고 경탄했다. 영감이 봇물처럼 흘러나오는 수많은 작품들을 짧은 문면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그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인 설악산아틀리에에서 세계를 향한 화살을 쏘아 올리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세상사를 멀리하면서 결사적으로 작품창작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이 땅에 남기는 유일한 흔적(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죽을 때까지 ‘설악산아틀리에’에서 예술 혼을 불태우며 산화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예술지상주의자인 그와의 인터뷰 일면을 소개한다.

 

작품활동을 처음 시작한 시기는 언제이며, 계기는?

초등(국민)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는 어느 날 당시 부산 송도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가 주말 고향(함안)으로 돌아와 초가집 사랑방에서 그림을 그릴 때 옆에서 만화 속의 그림을 그려보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교사였던 아버지는 서예가이자 화가였고, 두 살 많은 형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림을 그렸어요. 이런 영향 등으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 인터뷰 하고 있는 박종용 화백  © 박영주 기자


서울에 어떻게 상경했으며, 인사동 활동경위 및 초기작품들은 어떤가?

1968년 (마산)창신고등학교 입학했고, 그해 여름 부산에서 열린 한·일 친선마라톤 대회(중등부)에 출전하여 1등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음해 세계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을 배출한 양정고등학교에서 체육특기생으로 스카우트 하여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상경과 동시에 고려민예사 화가로 취업하면서 인사동에 화실을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운동)특기생으로 스카우트 되어 상경했지만, 상경한 후 고려 민예사 화가로 발탁되어 조계사 맞은편 인사동에 화실을 마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체육특기생으로의 운동 및 (보충)수업 등 학업 유지에 필요불가결한 시간 외에는,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만 집중했습니다. 오전 학교수업을 마치자마자 인사동 화실로 달려가 거의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때가 17살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조계사의 단청을 보고 불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삼각지 등에서 미군 초상화를 그렸으며, 충무로 등지에서 만화와 극장 간판 등을 그렸습니다. 또한 청계천 만물시장을 찾아다니면서 각종 그림과 골동품들을 관찰하면서 여러 분야의 그림들을 수없이 그렸습니다. 

 

추상회화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며,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군 근무 중(1974〜1977) 아버님이 타계하여 제대 후 학업(대학)을 계속할 상황이 되지 않아 그만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용인 및 천안(1990〜2006)시절은 가족 및 형제자매들을 위해 평면예술을 넘어 도자·조각·판화·타일그림 등, 전 장르로 확산시키면서 발버둥 친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작품들의 완숙미가 더해감에 따라 주위에서 ‘전천후예술가’로 추켜세웠지만, 도리어 고민과 괴로움만 커져갔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생계유지들을 위해 창작했던 작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상황에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번민 속에 살아 숨 쉬는 예술을 갈구하면서 새로운 추상예술의 창작을 결심했습니다. 이때가 2002년 겨울이었습니다. 

 

2004년 겨울부터 ‘천안아틀리에’에서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창작했으나, 형편없는 졸작으로 보여 큰 충격을 받았고, 2006년 여름부터 ‘설악산아틀리에’로 거처를 옮겨 추상표현주의 작품 창작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2015년 겨울경에야 비로소 심도 있는 작품들이 탄생되기 시작했고, 다시 3년여 세월을 거쳐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이 대거 탄생되어 지난해 예술의 전당, 춘천KBS 등에서 전시했습니다. 사실 이 과정은 동굴에서 빛을 찾아 발버둥친 혹독한 시기였습니다.

 

새롭게 창작된 추상표현주의 작품들(결)의 특징 등은 무엇인가?

솔직히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을 탄생시키는 과정들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고, 수백점이 어둠의 창고에 잠들어 있습니다. 저로서는 생명의 본원을 표현하려 하였지만, 오브제들은 땀을 흘리는 과정에서 저절로 표현되어진 것입니다. 딱히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으며, 생명을 염원하는 율동들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표현되어 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시시각각 유동하는 결의 물결들이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길 바랄뿐입니다.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이 해외에 까지 호평을 받아 미국·프랑스 등지에 전시요청 소식이 들리고 있는데, 진행과정 및 준비와 각오 등은 어떤가?

작년 한해 예술의 전당 및 춘천KBS 전시뿐만이 아니라, KIAF, 상해아트페어, 여러 전시에 화랑들의 요청으로 출품했습니다. 또한 연말 ‘(올해의)최우수예술가상’, ‘경제문화대상(미술부분)’ 등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알려져 작년 12월 미국 유수화랑의 초청방문을 요청받아 금년 2월 미국을 방문하여 전시 등을 협의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 프랑스 유수화랑으로부터 방문을 요청받았고, 일본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져 어리둥절한 상황입니다. 향후 계획 및 운명과 사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평가된다.”와, “예술의 세계는 스승도 제자도 없으며 독창적인 작품만이 전부다.”라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작품평가에는 허언이나 허황된 광고 등이 통하지 않고, 영감과 흘린 땀을 평가받을 뿐입니다. 앞으로 영감이 넘쳐흐르는 작품들을 더욱 치열하게 창작하여 냉엄한 평가를 받겠습니다. ‘설악산아틀리에’에서 세계를 향한 화살(작품)을 본격적으로 닦겠습니다. 사실 한강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만큼 가난과 절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운명에 순응하면서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작품하면서 사명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설악산아틀리에’에서 세계를 향한 화살(작품)을 본격적으로 닦겠다는 박종용 화백의 다짐은 결연한 자기선언이자, 앞날의 예술적 풍요를 예고하는 光輝(광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고비 고비마다 천부적 才能(재능)을 표출하면서 불모의 땅을 헤쳐 왔다. 이제 다시 형체 너머 형체를 있게 한 우주의 본질을 자신만의 물성언어로 파헤치기 위해 고독한 아틀리에에서 화살을 가다듬고 있다. 아틀리에의 밤은 깊어만 가고... 그의 붓놀림은 점점 격렬해지고 있다.  

 

▲ 작업중인 박종용 화백  © 박영주 기자

 


창공을 날아간 박종용의 화살(작품)이 박히는 땅에서 세계인들의 환호 기대 


 

화운당 박종용 화백은 참으로 특이한 작가다. 그는 홍익대 미대 및 서울대 미대 등 명문 미대출신도 아니고, 더욱이 국전출신 작가도 아니다. 그야말로 우리화단에서는 설움 많은 아웃사이드 작가인 것이다. 1980년대 초 국전에 한번 출품했으나 낙방하였고, 입선작품들을 관람하였다가 자신의 눈에 보잘 것 없는 작품들이 입·특선된 것에 충격 받아 국전을 포기하고 재야작가의 길을 걸었다.


1970〜1980년대 대가들이 그에게 작품을 부탁하여 그려준 작품으로 자기 낙관을 찍어 판매하기도 했고, 1980년대 초반 그가 그려준 작품들이 국전에 수없이 입·특선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이 스승격인 풍곡 성재휴 화백의 심사위원장 시절 들통 나 호된 질책을 받고 그만두기는 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박 화백 작품이 그만큼 뛰어남을 반증하는 것이다. 비운과 비화의 주인공인 것이다.

 

꿈 많던 청년시절은 군 복무기간 중(1974〜1977) 아버지의 갑작스런 타계(1975)로 전변된다. 제대 후 어머니 및 6형제자매들의 생계를 위해 학업(대학)을 중단해야만 했다. 생계유지의 유일한 수단은 자신의 그림뿐이었다. 인사동·용인·천안아틀리에를 전전하면서 손발이 벗겨지도록 각종 회화는 물론 도예, 탈·불상 등 각종 조각과 판화, 타일그림까지 닥치는 대로 제작하면서 살기위해 발버둥 쳤다. 다행스럽게 작품성을 인정받아 일본 등지에 팔려나가는 바람에 간신히 생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눈물의 30년 세월을 버틴 것이다.

 

▲ 작업중인 박종용 화백  © 박영주 기자

 


백색‘설악산아틀리에’는 세계로 비상하는 명작창작 산실


 

이런 과정에서 ‘전천후 예술가’로 명명되었지만, 자신의 작품들이 역사 속에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갈등과 번민은 커져만 갔고, 운명의 계시에 따라 생명예술에 대한 갈구는 추상표현주의 작품창작으로 이어졌으나 초기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다. 이후 2006년 여름 ‘설악산아틀리에’로 옮겨 구슬땀을 흘린 결과 2015년부터 비로소 심도 있는 작품들이 탄생하기 시작했고, 다시 3년여 세월을 거쳐 명상과 신비 및 시상과 율동을 내뿜은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렇게 탄생된 작품들은 작년 내내 예술의 전당, 춘천KBS 방송국 등에서 전시되어 열풍을 일으켜 박종용의 예술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고, 급기야 미국·프랑스까지 알려져 전시초대를 받게 됨으로서 세계의 하늘 길을 연 것이다. 그럼에도 이해관계에 얽매인 국내예술계는 이를 애써 외면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과 관계없이 불원간 그의 화살(작품)은 창공을 날아 세계예술의 메카이자 본향인 미국과 프랑스에 쿵하고 박히면서 세계인들의 환호를 불러올 것이다. ‘세계인 박종용 탄생’이란 신화창조의 서막이 기대되는 상황이다.

 

절해고도 ‘설악산아틀리에’의 밤은 깊어만 가고, 비바람은 더욱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인간의 붕괴와 애환들은 수없이 보아온 그는 깊은 밤 세찬 비바람 속의 백색 아틀리에에서 신화창조를 향한 열정으로 더욱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백발을 휘날리면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예술인이자 간연(間然)함 없이 융합되어진 예술의 원형 그 자체이다. 불원간 그가 쏘아 올리는 화살(작품)들이 세계를 경탄시킴으로서, 그의 백색 ‘설악산아틀리에’가 세계로 비상하는 명작창작의 산실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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