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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지렁이 / 임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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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선
기사입력 2020-08-24

지렁이

 

깨진 화분의 흙을 쏟았더니

지렁이 한 마리 나와 꿈틀거린다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갑자기 밝은 빛에 몸 둘 바를 몰라

도망도 가지 못한다

 

출렁거리는 몸짓과

앞뒤를 모르는

뒤엉킨 시간이 눈앞에서 꿈틀거렸다

 

직립으로 분주하던 시간들

칸칸이 혼자 살고 있다는 생각, 버렸다

다시 화분에 지렁이를 넣어주고 잘 덮어주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흙 속에 숨겨 두었다

 

# 나무가 잘난 줄 알았다. 분갈이도 해주지 않은 딱딱한 흙 위에 “직립”으로 꼿꼿하게 서서 푸른 이파리도 내밀고, 꽃도 피우기에 나무가 우수한 품종이기 때문인 줄 알았다. “깨진 화분의 흙을 쏟았더니/지렁이 한 마리 나와 꿈틀거린다”. “갑자기 밝은 빛에 몸 둘 바를 몰라” 꿈틀거리는 “지렁이”는 화원 아저씨가 나무를 위해 화분 속에 넣어준 것일까? 나무뿌리 아래서 머물던 지렁이가 화분 속에 함께 옮겨진 것일까? 물만 주었던 화분 속에서 어떻게, 무얼 먹고 살고 있었던 것일까.

 

‘흙의 창자(intestine of soil)’라고 불리는 “지렁이”는 흙 속의 박테리아나 미생물, 뿌리의 부스러기 등을 먹으면서 분갈이도 안 하여 딱딱해진 화분 속의 흙을 여기저기 들쑤셔 주었던 것이다. 지렁이가 만들어준 흙 속의 통로 때문에 나무의 뿌리는 숨쉬기도 편하고, 실뿌리의 노동도 수월했을 것이다. 지렁이의 배설물이 흙과 섞여 나무에 필요한 영양분을 만들어 주었기에 작은 화분 속에서도 나무는 푸른 이파리를 윤기 나게 내밀고 향기로운 꽃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리라.  

 

팬데믹(pandemic) 세상을 건너며, “칸칸이 혼자 살고 있다는 생각”에 외롭고 힘들었던 자기연민의 “뒤엉킨 시간들이” “눈앞에서 꿈틀거린다면”, 천천히 주위를 돌아볼 일이다. 우리가 생존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기도, 햇살도, 물도 “지렁이”처럼 생색내지 않으며 우리를 돕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잘났다고 뽐내어도 혼자서만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매일 매일 살아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타인의 노동의 대가로 자신의 필요를 채우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마음의 흙 속에 담아두면, 강한 사람만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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