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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화백의 인생과 예술에 대한 단상(斷想)

마음의 눈과 감성의 붓으로 독자화풍 개척…존재의 미학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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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국 기자
기사입력 2020-09-03

마음의 눈과 감성의 붓으로 독자화풍 개척…존재의 미학 드러내 

 

강원도 강릉시에 위치하고 있는 능가사(대한불교조계종) 주지인  법관 화백(스님)은 참으로 특이한 존재다. 그는 격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선승(禪僧)이자 영원한 예인(藝人)으로서 예술행위 그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주목의 대상이 되어 질 수 있는 상황이다. 특히, 그의 작품세계는 선화 및 환상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색채의 향연으로 불리는 유혹적인 색면 추상시대를 넘어 자연과 생명의 빛을 향한 순정(純正)한 순수 추상시대를 전개하면서 미래가 기억할 작가로 부상하고 있다.

 

▲ 좌) ‘선(禪)’ 석채·혼합재료. 38×45.5cm(가로×세로). 2012년 / 우) ‘선(禪)’ 석채·혼합재료. 80.5×116cm(가로×세로). 2013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우선 법관의 작품들은 깊은 사색과 성찰이라는 수행정진 과정에서 탄생된 육필언어로서, 명상의 수행(修行)과정에서 인간사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붓끝으로 잠재우면서 탄생된 구도(求道)의 선(禪)예술로서 깨달음과 겸손의 미학이다.

 

더하여 그의 예술들은 홀로 떠난 여행(수행) 과정에서 깊은 사색과 내적 통찰을 통해 우주(근원)의 본질에 육박하려는 명상과 통찰의 미학이다. 마치 침묵의 땅 깊은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듯한 점(點)과 선(線)들의 향연(饗宴)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돋아나는 새순처럼 속삭이면서 맞바람의 속살 속에 남겨진 시간의 무늬처럼 진정한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있다. 영혼의 숨결로서 말이다.

 

결국 그의 예술(작품)들은 문제(우주)의 근본을 찾아내고자 하는 생각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물성(조형)언어다. 그는 작품들을 통해 시끄러움 속에 무엇인가에 쫓기듯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관조와 명상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서 본원(우주)의 깨달음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채근담의 ‘조용한 가운데서 사물의 움직임을 보고, 한가한 곳에서 처해 다른 사람의 바쁜 것을 보아 비로소 세속의 취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從靜中觀物動,向閒處看人忙才,得超塵脫俗的趣味 遇忙處會偸閒,處鬧中能取靜,便是安身立命的工)’와, 반야심경의 ‘범부 중생의 눈으로는 색이 실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부처의 눈으로 보면 실체가 없는 공이니, 현상세계의 색이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혹에서 벗어나서 그 실상을 보고 집착을 버려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라는 만유의 세계인 것이다. 물론 그의 예술은 신(神)과 전우주(全宇宙)를 동일시하는 종교적·철학적 혹은 예술적인 사상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범신론(汎神論)에 일부 맞닿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예술은 감동’이라는 미의 전달과 평안이다. 더하여 ‘모든 물질은 그 자체 속에 생명을 갖추고 있어서 생동한다.’는 物活論에 근거한 오브제(작품)들의 생명력 갈구다. ‘작품의 영혼이 신체를 이루고 있다’는 그의 예술철학과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의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는 것은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질료(예술)생명론’은 맞닿아 있는 듯하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영원한 생명의 바다가 그의 예술인 것이다.

 

어쨌든 그의 예술은 선(禪)수행으로부터 오는 긴 시간의 흐름(역사)에 대한 기록으로서, 벽산(碧山)을 향해 붉음을 토해내는 求道의 선(禪)예술이다. 또한 화면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무심(無心)은 선(線)으로 스며들어가 선(禪)으로 탄생되는 탄생된 작품들이 우주를 비행해 주길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깊은 명상(수행) 속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경지)에서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경계를 넘어가며 무념(無念)의 상황에서 창작되었기에 우선 정신적인 충만감을 안겨주고 있다. 집착과 갈등이 해소되었을 때 느껴지는 그런 정신적 충만감 말이다.

 

그는 현재 홀로 떠난 여행(수행)길로부터 깊은 사색과 통찰의 과정을 통해 절대적 의미의 순수 추상회화의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개척)하면서 우주의 본질을 향해 비행하고 있다. 그의 순수(절대) 추상예술세계는 어느 사조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화풍으로서, 자유로운 영감과 여행(수행)으로부터 탄생된 법관 고유의 (추상)표현주의이다. 마음의 눈과 감성의 붓으로 다양한 점·선·면의 비대칭적 기하학적 표현들과 상징적인 부호 등을 일정한 형식 등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숨결을 담아내는 존재의 미학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작품들은 여행(수행)을 통안 철학적 사유(깨달음)의 결과물로서 영혼의 결정체다. 그의 철학(깨달음)을 담아내고 있는 순정(純正)의 작품세계를 고찰해 본다.

 

법관미학의 최고가치는 균형(均衡)

만물의 존재가 의지하여 동일체를 이루려는 성상(成相)예술

작품들을 통한 소통과 위안 갈망

 

벽산(碧山)을 향해 붉음을 토해내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법관 화백의 예술세계를 짧은 문면(文面)으로 담아내기는 불가능하며, 그의 (예술)철학이 함축되어 있는 작가노트 등을 통해 인생과 예술철학의 대강을 스케치할 뿐이다. 그간 법관 화백은 심도 깊은 작가노트와 전시회 인사말을 통해 자신의 예술 철학 등을 피력했다. 근간의 작가 노트 등을 통해 그의 인생과 예술을 살펴본다.

 

▲ 좌) ‘선(禪)2020’ 캔버스에 아크릴. 112×162cm(가로×세로). 2020년 / 우) ‘선(禪)2020’ 캔버스에 아크릴. 112×162cm(가로×세로). 2020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그림은 본래 자기의 성품을 잘 드러내야 하고, 그 성품은 수행을 통해 간결하고 욕심 없는 가운데 즉심에서 나와 모자람과 어리석음을 넘어 부족함이 없는 가운데서 오롯이 모든 것을 능히 담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간결하고 맑으며 모자람이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여야 하고, 고졸함이 잘 다듬어진 인품을 담은 노인네와 같아서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하여도 감동을 주어야 한다. 또한 수행을 통해 얻은 바를 드러내되 잘 정제되어야 하고, 단조로운 가운데 단조롭지 아니하고 복잡하더라도 어지럽지 아니 하여야 하며,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드러나야 하고 불완전한 듯하면서도 변화를 주어야 하지만 지극히 안정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안으로 품고 있어 밝고 은은함이 속으로부터 비쳐 나와 마치 잔잔한 호수를 보는 것 같아야 하며, 그 바탕은 우리 일상 삶에 두어야 한다. 작은 듯 크게 보여야 하고 좁은 듯하지만 넓게 보여 확장성이 있어야 하고, 겸손하되 그 당당함이 하늘을 덮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느낌으로 전달되어야 하고 따뜻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드러냄 없이 드러내고, 깊고 따뜻함이 내적으로부터 나와 사람의 마음을 원만하게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근본 마음을 일상에 두어야 하고,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균형을 이루는 데 있어 군더더기를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 맑기가 거울과 같아야 하고 그 뿌리가 훤히 드러나 진정성이 보여야 한다.

 

안으로는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밖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안정되고 한가로워야 한다. 마음과 힘이 균형을 이루어 어느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을 때 비로소 부분이 아닌 전체가 눈에 들어옴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억지로 마음을 내지 않으면 평상심에서 보는 참으로 묘한 도리를 보게 될 것이다. 

 

마음을 뚫고 투과해서 그리는 사람과 그려진 그림이 하나가 되어 보는 이도 그리는 이도 그려진 것도 없어야 비로소 우주의 펼쳐짐을 눈앞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법관 작가노트.. 2020. 08)“

 

예술인의 자세와 그림이 전달하는 메시지 등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려는 작가노트다. “그림은 나를 찾아가는 또 다른 수행이며, 한 걸음씩 내딛는 내 모습입니다...(중략) ...펼쳐진 세상 모두가 하나이기에 맑고 따뜻함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선-2011. 인사말>”와 같은 그림에 대한 철학적 사유다.

 

법관 화백에 있어 그림(예술) 세계의 최고가치는 ‘균형(均衡)’으로서 수시로 이를 강조하곤 했다. 그러나 법관에 있어 균형이란 감각, 시메트리(Symmetry)로 인식(지칭)되는 좌우균제 차원이 아니라 깨달음의 이치이다. 즉, 삼라의 근본원리(우주·작품)를 푸는 열쇠인 것이다. 이번 작가노트에서 밝힌 “...우주(작품)의 펼쳐짐을 눈앞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를 관통시키는 핵심 키워드는 ‘균형(均衡)’으로서, 이는 법관예술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있지 않고 없는 것, 그것조차 분별하지 않는 마음, 즉 치우침이 없는 ‘균형(均衡)’은 깨달음을 이치이자 우주를 향한 비행선(작품)의 입구로서 소통과 통합의 프로펠러이다. 동시의 균형의 입구는 자유롭게 개방되어진 무심(無心)의 열린 예술이다.

 

법관 화백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불가에 귀의한 선승(禪僧)으로서 불법(佛法)을 철저히 실천하면서 창작이 수행이라는 철학으로 수행정진 하는 수도승(修道僧)일뿐, 결코 신비주의자는 아니다.

 

법관 화백은 드로잉 과정 없이 캔버스 위에 수많은 점과 선들을 무의적으로 찍고 또 찍어나갈 뿐이다. 이런 과정에서 처음의 점과 선들은 새로운 점과 선들에 의해 바탕으로 가라앉게 되고, 이를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 중에 말로서 어찌 표현할 수도 없는 형언할 수 없는 형상들이 자연스럽게 탄생된다. 이런 과정에서 화면은 미묘한 층들로 형성되거나, 마치 공기가 넘나드는 듯한 통로(여백)가 만들어져 관람객들을 시선을 유혹한다. 이렇듯 작품은 화면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탄생되어진 순정(純正)한 영혼의 결정체다. 작품창작과 관련 작가는 “수년(3년)전까지는 하루 평균 15〜16시간 작업했으나 건강이 많이 약화되어 현재는 10〜11시간 내외로 조절하여 작업하고 있다” 면서 작업근황을 전했다. 정말 화면과의 피나는 싸움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그의 작품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다의적이다.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시상과 운율이 넘쳐흐르고 있다. 신비의 예술로 칭하여도 부족함이 없다. 윤진섭 평론가는 “...그의 예술의지는 오로지 투명한 세계를 관철시킴으로써, 有名에서 無名을 얻으려함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법관 화백(스님)의 인생은 신비주의도 아니고, 오로지 불국정토를 향한 계율(戒律)을 철저히 실행하면서 그림이 수행이라는 일체(一體)론의 철학 속에 수행 정진하는 수도승(修道僧)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화면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탄생되어진 작품들은 흥의 미학을 넘어 노동과 수행으로 얼룩진 명상과 깨달음의 미학으로서 영혼의 결정체다. 우주 만물의 여러 가지 존재가 서로 의지하여 동일체(同一體)를 이루는 성상(成相)의 예술로서 고요와 명상 및 운율과 시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쨌든 작품들은 선(禪)수행에서 오는 긴 시간의 기록으로서, ‘깨달음의 미학’이다. 작가는 작품들이 서로를 이어주는 예술의 다리가 되어 낯섬과 소통하면서 찌든 삶의 과정에서 오염된 마음들이 조금이나마 정화되고 위로받기를 갈망하고 있다. “수행을 통해 얻은 마음의 평안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작품이 그러하겠지요”라는 작가 법관의 무심한 고백은 이의 갈망이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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