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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희망은 사납다 / 이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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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선
기사입력 2020-12-14

희망은 사납다

 

희망이 싫증날 때,

보이지 않을 때,

배고플 때

여우야,

가시나무 붉은 

열매라도 먹어라

 

폭설,

폭설이 앞을 지운다

모든 길이 지워진 밤

웬 총구는 이리 많은지

폭설 속 배고픈

짐승을 잡는

사냥꾼들이

세상엔 참 많구나

 

여우야,

얼음 골짜기에 갇혀

길 찾는 여우야

살아남아라

가시나무 붉은

열매라도 따먹고서

살아남아라 

 

# 견디어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화면 가득 펼쳐진 눈벌판 위로 털이 꺼칠한 여우 한 마리가 먹이를 찾으며 걷고 있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땅에 귀를 대어 본다. 깊게 눈 쌓인 땅속 동굴에서 웅크리고 있을 두더지나 쥐나 토끼의 움직임을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걷는다. 동서남북 방향도 알 수 없는 눈벌판 위를 시린 발로 걷는 야생의 목숨에게 혹한의 겨울은 가혹하기만 하다. 한참을 헤매던 여우는 가시나무 쪽으로 다가간다. 몇 개의 붉은 열매가 앙상한 가시나무에 매달려 있다. 시린 한쪽 발로 붉은 열매를 건드려 보더니, 가까이 다가가 붉은 열매를 따먹는다. 어쩔 수 없이 나무 열매라도 따먹으며, 식성까지 바꾸어 살아남으려는 여우에게 “희망은 사납다”.        

 

‘이 풍진 세상’에서 “희망”을 품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우리 민족처럼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을 겪고, 극심한 굶주림과 이산(離散)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의미에의 의지(will to meaning)’ 였으리라. 희망은 ‘진취모험 정신’과 어깨를 두르고 서로 촉진작용을 일으키며 현실을 넘어서고자 한다. A. C. 그레일링(Anthony Clifford Grayling, 1949)은 ‘인간에 관한 유일한 진실은 인간에게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뿐이’라며,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할 일은 ‘창조하는 것뿐 이기에 희망은 현실 여부를 떠나 하나의 미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희망이 사나운” 것은 희망이 실현되는 시간이 불명확하다는 데 있다. 언제 희망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폭설”이 내리듯, “모든 길이 지워지”고 사방에선 희망을 말살하려는 “총구”들이 차갑게 번뜩거려 ‘희망고문’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래도 “얼음 골짜기에 갇혀/길 찾는 여우”처럼, “가시나무 붉은/열매라도 따먹고서/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길과 같아,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다니면 결국 생겨나게 되는 것’이라는 루쉰(魯迅)의 말을 되새겨 본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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